삼성전자, 올해 파운드리·HBM·스마트폰 등 성과 가시화
주축 사업 ‘건강한 긴장’ 주는 변화도 과감히 단행해야
[시사저널e=고명훈 기자] 삼성전자가 그룹의 실질적인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는 사업지원TF에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사업지원TF장을 맡았던 정현호 부회장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보좌역으로 이동시킨 게 무엇보다 컸다. 삼성의 2인자를 사실상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셈이다.
정 부회장은 1980년대 삼성전자에 입사해 그룹 비서실과 구조조정본부, 미래전략실 등 회사의 핵심 컨트롤타워 조직을 두루 거치면서 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 선대회장이 후계자인 이재용 회장의 하버드 유학길에 정 부회장을 함께 보내 인연을 맺어준 것으로 전해진다. 정 부회장은 그 이후에도 이 회장의 곁을 지키며 지난 2017년 국정농단 사태 이후 미래전략실 해체로 신설된 사업지원TF의 수장을 맡았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 부진이 잇따르자, 회사 안팎에선 정 부회장이 이끄는 사업지원TF가 과도한 경영개입으로 차세대 제품 개발 및 신사업 투자 등을 발목 잡고 있단 지적이 제기돼왔다. 지난해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열린 대규모 노조 집회에선 “삼성의 결정 권한은 모두 정현호 부회장에 있으며, 이재용 회장은 바지사장에 불과하다”는 비아냥 섞인 목소리도 들렸다.
정 부회장은 결국 이 회장 보좌역이라는 새로운 임무를 받아 이선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사업지원TF는 사업지원실로 조직 개편됐다.
업계에선 사업지원실이 상설조직으로 개편됨에 따라 향후 회사의 AI 중심 사업전략 방향을 결정 짓는 조직으로서 더 큰 힘이 실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 회장은 해당 조직의 수장으로 박학규 사장을 선임했다. 박 사장은 이 회장이 깊이 신뢰하는 최측근으로, 삼성SDS 최고운영책임자(COO)와 삼성전자 DS(반도체 사업)부문 경영지원실장(CFO), 전사 경영지원실장, DX(디바이스 사업)부문 경영지원실장 등을 역임했다.
이로써 그룹 컨트롤타워에 대한 조직개편과 사장단 인사는 마무리됐다. 이제는 반도체를 포함해 각 사업부문 수장에 대한 인사가 남았다. 통상 11월말 나왔던 삼성전자의 사장단 인사는 올해는 조금 일찍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은 그간 오랜 침체기 끝에 희망의 불씨를 피우게 된 한해로, 전년 대비 큰 폭의 실적 개선 성과에 따라 승진 규모도 클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다만, DS부문장을 비롯해 메모리사업부장, 파운드리사업부장, 시스템LSI사업부장 등 주요 사업부 수장은 큰 변동 없이 유지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전영현 DS부문장(부회장)이 현재 메모리사업부장까지 겸직하고 있어 이를 다른 인물에게 넘겨줄지 정도가 주목되는 사안이다.
DX부문도 마찬가지 노태문 DX부문장 직무대행(사장)의 정식 부문장 취임과 노 사장이 겸직 중인 MX(모바일사업)부문장, 품질혁신위원장 중 일부를 다른 인물이 가져가는 그림을 제외하곤 큰 변화가 감지되지는 않는다.
미국에 반도체 전설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 1987년 인텔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해 과거 메모리 사업 위주의 회사를 CPU 중심으로 체질 전환에 성공함으로써 10년 동안 인텔의 시장 가치를 약 45배 올려놓은 앤디 그로브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성과가 좋아도 약신호를 탐지하고, 작게 실험해 배우고, 필요할 땐 과감히 전환”하라는 철학을 책이나 논문, 연설 등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이 회장은 올해 사법 리스크를 벗고 이렇다 할 성과들을 많이 이뤄냈다. 부진하던 파운드리 사업에서 테슬라로부터 대규모 장기공급계약을 끌어냈으며, 질질 끌어오던 HBM 부진에서도 벗어나 큰 폭의 실적 개선을 이뤘다. 스마트폰에선 갤럭시S25 시리즈와 신형 폴더블폰에서 AI와 폼팩터 경쟁력 확보에 성공했단 평가다. 최근엔 한국을 방문한 젠슨황 엔비디아 CEO와 소맥 러브샷까지 보여주며 전방위적인 협업을 약속하기도 했다.
잘 될 때 핵심을 유지하고 보강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한 긴장을 주는 작은 변화도 CEO가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꼽힌다. 이 회장이 올 연말 사업부 사장단 인사에서 안정과 함께 또 어떤 ‘작은 실험’을 단행할지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