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석유사 수직통합 논의 진전 더뎌
금융권 자율협약 체결했지만 업계 부담 커
공정위 “심사 신속히”···정부 유인책 요구 확산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석유화학 구조조정 마감 시한이 석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업계의 발걸음은 여전히 더디다. 정부는 연말까지 나프타분해시설(NCC) 감축안을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금융권은 지원 틀까지 마련했지만, 정유사·석유사 간 온도 차가 커 물밑 논의만 분주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5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여수·대산·울산 등 3대 산업단지에서 석유사들은 최적의 정유사 파트너를 물색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정부가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로 꼽은 수직통합 방안 때문이다. 석유사들은 원가 절감과 효율화를 기대할 수 있어 적극적이지만, 정유사들은 NCC 리스크와 고용·지역경제 부담에 발목이 잡혀 있다.
여수산단에서는 GS칼텍스, LG화학 등이 협상 구도의 중심에 서 있다. 울산에서는 SK에너지와 SK지오센트릭, 대산에서는 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이 각각 수직통합 파트너로 거론된다.
하지만 기존 설비 가치 산정과 보상·지분 정산 방식을 둘러싼 견해차가 커 본격적인 협상 테이블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정유사와 석유사 시각이 달라 구체적 안이 나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업계는 앞서 연말까지 270만~370만t 규모의 NCC 생산 감축 목표를 설정했다. 국내 전체 에틸렌 생산량의 20~25% 수준으로, 3대 석유화학 단지를 중심으로 최소 4~5기의 NCC 설비를 줄여야 달성 가능한 수치다. 산술적으로 1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수·울산·대산 단지 근로자만 5만3400명에 달하는 만큼 고용 충격과 지역경제 파급은 불가피하다.
정부는 ‘선 자구 노력, 후 지원’을 원칙으로 고수 중이다. 하지만 업계는 세제 부담 완화나 기업결합 심사 특례 등 구체적인 유인책 없이는 협상 진전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정유사들은 올해 상반기 적자를 기록하며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NCC 설비 감축 동참은 비용·인력 부담이 불가피한 상황이어서 정부 인센티브 없이는 참여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금융권은 지원 틀을 마련했다. 지난달 은행연합회와 17개 은행·정책금융기관은 ‘산업 구조혁신 지원 자율협약’을 체결했다. 만기연장, 금리조정, 신규자금 지원 등을 통해 구조조정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협약이 ‘구조조정 압박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구체적인 지원 방향이 나온 건 긍정적이지만, 금융권의 조건부 지원이 자칫 준비되지 않은 사업 재편을 서두르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속도를 내겠다는 방침이다. 공정위는 지난달 10개 석유화학 기업을 불러 기업결합 심사 간담회를 열고 “책임 있는 자구 노력을 보이는 기업에 대해서는 심사 역량을 우선 배정하겠다”고 밝혔다. 사전컨설팅, 예비심사 제도 등을 적극 활용하면 절차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정부·금융권의 압박과 지원에도 정작 업계는 선뜻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구조조정안 마련 기한이 석 달 남았지만, 뚜렷한 감축안이나 통합 구도가 공개되지 않은 채 ‘눈치 보기’만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NCC 특성상 한 기업이 먼저 감축하면 경쟁사가 반사이익을 보게 돼 선제적으로 나서기 어렵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