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황기엔 리스크 분산···불황기엔 책임 공방
대주주 갈등 속 전국 NCC 구조조정 논의도 제자리

여천NCC 제1사업장 야경. / 사진=여천NCC
여천NCC 제1사업장 야경. / 사진=여천NCC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국내 3위 에틸렌 생산업체 여천NCC가 한화그룹의 추가 지원 결정과 DL케미칼의 2000억원 유상증자 발표로 일단 숨통이 트였지만, DL 측 자금이 실제로 여천NCC에 투입될지는 불투명하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유동성 위기를 넘어 50:50 합작사 구조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산업 구조조정에서 어떤 병목이 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도 나온다. 업계에서는 합작사 구조가 호황기에는 ‘리스크 분산’의 이점을 갖지만, 불황기에는 오히려 ‘의사결정 교착’이라는 약점을 드러내 위기대응 능력을 떨어뜨린다고 분석한다.

◇ 자금 수혈 앞두고 드러난 불신의 골

여천NCC는 1999년 외환위기 직후 석유화학 업계의 과잉 설비와 중복투자를 해소하기 위해 출범했다.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지분을 50%씩 보유했고, 공동대표와 같은 수의 이사로 경영권을 나눠 갖는 구조다.

합작 후 여천NCC는 가동률과 에너지 효율을 높여 ‘효율형 NCC’로 평가받았다. 한때 연간 1조원대 영업이익을 내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자리 잡았고, 설립 이후 25년간 양 대주주에 배당한 금액만 4조4000억원(각 2조2000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잘 나가던 여천NCC가 누적 적자로 자금난에 빠지면서 양 대주주 간 입장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여천NCC는 지난 2022년부터 3년 연속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고, 올해 3월에도 자금 부족분 2000억원을 양사가 절반씩 나눠 메웠다. 그러나 불과 석 달 만에 다시 자금난이 닥치자 한화와 DL의 입장은 갈라졌다.

한화는 지난 7월 1500억원 추가 지원을 승인하며 “부도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DL은 “부실 원인부터 파악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이 과정에서 ‘저가 수주’ 논란이 불거졌다. DL은 한화가 여천NCC에서 에틸렌을 싸게 공급받아 경영난을 심화시켰다고 주장했고, 한화는 오히려 국세청 추징금 1006억원 중 96%가 DL과의 거래에서 발생했다며 반격했다.

이 추징금은 여천NCC가 주주사에 시가보다 낮게 원료를 공급했다는 이유로 부과됐다. DL 측은 과거 유사 사례에서 소송을 통해 취소 판결을 받은 전례를 들며 법적 대응 중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두 대주주의 신뢰는 크게 훼손됐고, 국세청까지 과세 논리로 활용할 여지를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충남 서산시 소재 HD현대케미칼 공장 전경. / 사진=HD현대케미칼
충남 서산시 소재 HD현대케미칼 공장 전경. / 사진=HD현대케미칼

◇ 전국 구조조정 논의도 차질

여천NCC 갈등은 여수국가산단뿐 아니라 전국 석유화학 구조조정 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산·울산·여수를 비롯한 주요 산단에서는 최소 1개 이상의 NCC 설비를 통폐합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합작사마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결론이 나지 못하고 있다. 

대산 석유화학단지에서는 HD현대케미칼(HD현대오일뱅크 60%·롯데케미칼 40%)이 롯데케미칼의 NCC 설비를 인수·통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고용 보장과 현금 보상 조건에서 양측이 이견을 보이며 협상이 지연되고 있다. 

◇ 합작사의 구조적 한계와 해법

합작사 구조는 호황기에 배당 수익을 극대화하고 대규모 투자 위험성을 분담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불황기에는 추가 자금 투입과 구조조정에서 책임 공방과 지연이 불가피하다. 특히 50:50 구조는 어느 한쪽도 독자 결정을 못 해 위기대응 속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합작 구조는 서로의 강점을 결합해 시너지를 낼 수 있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이해관계와 목적이 달라 한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며 “특히 50:50 구조는 한쪽이 반대하면 의사결정이 멈추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여천NCC 사례는 특정 기업의 문제가 아닌 합작 NCC들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병목이 반복되면 산업 전반의 재편이 지연되고 국제 경쟁력은 더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정부가 구조조정 합의 기업에 세제·금융 지원을 병행하는 등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또 공정거래법상 담합 소지를 줄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구조조정 과정에서 지역경제와 고용 충격을 완화할 방안도 병행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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