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대출 규제에 이주·입주 모두 막혀
조합원 “사업 포기 고민”···시장 관망 확산
전문가 “공급 축소로 가격 불안 심화될 것”

[시사저널e=길해성 기자] 전방위적인 대출 규제로 재건축·재개발 현장이 큰 혼란에 빠졌다. 정부는 세입자가 들어올 때 받을 수 있었던 전세대출을 막고 이주하거나 입주할 때 빌릴 수 있는 돈의 한도도 크게 줄였다. 그동안 건설사가 부담해 온 이주비도 수조원대로 불어나 지원이 사실상 어렵게 됐다.

업계에선 이번 조치가 단순한 투자 억제를 넘어 주택 공급 위축과 전세난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이번 대출 규제의 핵심은 이주·입주·잔금 모든 단계에서 자금줄을 제한한 점이다. 먼저 분양권을 취득하거나 입주를 앞둔 조합원이 세입자를 받아 전세보증금으로 잔금을 마련하는 소유권 이전 조건부 전세대출이 전면 차단됐다.

이주비 대출은 종전의 담보 인정비율(LTV) 50% 수준에서 최대 6억원으로 한도가 낮아졌다. 입주 시에도 잔금대출이 동일한 한도로 묶여 고가 아파트일수록 자금 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평가다.

시중은행의 한 가계대출 창구에서 차주가 대출 상담을 받고 있는 모습. / 사진=연합뉴스
시중은행의 한 가계대출 창구에서 차주가 대출 상담을 받고 있는 모습. / 사진=연합뉴스

조합원들은 갑작스러운 대출 제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2주택 이상 보유자는 이주비 대출이 전면 차단돼 대체 거처를 마련할 방법조차 사라졌다. 강남구 개포주공6단지와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 등 대규모 단지에서는 이주 일정을 미루거나 임시 거처 계약을 취소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한 조합원은 “6억원으로는 인근 전세도 못 구한다”며 “사업 참여를 포기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전했다.

건설사들도 자금 압박이 심화될 전망이다. 그동안 일부 대형 시공사는 조합원들의 부족한 이주비를 대신 지원하며 사업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대출 한도가 줄면서 부담이 수조원대로 불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강남권에 위치한 2000가구 규모 단지의 경우 종전에는 약 1조원 안팎의 이주비가 대출로 충당됐지만, 이번 규제로 건설사가 보전해야 할 자금만 2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건설사 입장에서는 재무 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만큼 추가 지원이 부담스러워졌다.

조합원과 시공사 모두 자금줄이 끊긴 상태에서 사업 추진 동력이 급격히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시장에서는 벌써부터 거래 위축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 자료에 따르면 대책 발표 직후 1주일간 서울 아파트 거래량은 전주 대비 약 35% 줄었다. 강남과 서초 등 주요 지역 중개업소들은 매수 문의는 물론 전세 물건도 급감했다고 전했다.

중개업계 관계자는 “대출 규제로 자금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하는 상황이라 관망세가 길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울의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 / 사진=연합뉴스
서울의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 / 사진=연합뉴스

정부는 이번 조치가 실수요자 보호와 과도한 부채 억제를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입장이다.

금융위원회는 “투기성 갭투자를 차단하고 시장 과열을 진정시키겠다”며 “필요시 보완책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토교통부도 “실수요 보호와 공급 정상화를 조화롭게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다만 현장에서는 실수요와 투기를 한데 묶어 규제하면서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른다. 정부가 공급 확대를 말하면서도 정작 돈줄을 막아 사업 자체를 멈추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규제가 장기화될 경우 공급 위축과 전세난이 심화될 것으로 우려한다.

권대중 서강대 일반대학원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비사업은 대규모 이주와 분양이 이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자금이 막히면 공사 일정과 입주 계획이 줄줄이 연기될 수밖에 없다”며 “결국 서울 도심 주택 공급이 줄어 가격 불안이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규제를 탄력적으로 적용하거나 일부 완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투기 목적 대출만 선별해 규제하고 실거주 목적의 자금 조달은 예외를 둬야 한다”며 “지금처럼 일괄적으로 돈줄을 막으면 시장 혼란만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당분간 재건축·재개발 시장은 정부의 추가 대책이나 규제 완화 여부에 따라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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