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 나흘 만에 1.4만명 돌파···서울시도 실태 조사 착수
1+1 조합원 “다주택자 취급에 대출 막혀 이사 막막”
정비업계 “공급 목표 앞세운 규제, 현실 외면한 셈”
[시사저널e=길해성 기자] 정부의 이주비 대출 규제에 대한 반발이 정비사업 현장에서 확산되고 있다. 조합원들 사이에선 “6억원으론 이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관련 국회 청원은 나흘 만에 동의자 수 1만명을 넘었다.
정비사업이 멈춰 설 경우 정부의 공급 확대 기조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 한남2구역, 관리처분인가 앞두고 자금 조달 ‘비상’
14일 업계에 따르면 국회 전자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금융위원회의 이주비 대출 규제 정책 전면 재검토 요청’ 청원은 이날 기준 동의자 수가 1만4000명을 돌파했다. 해당 청원은 다음 달 6일까지 진행되며 5만명을 넘기면 국회 상임위 심사 대상으로 올라간다.
정부는 지난달 27일 무주택자는 최대 6억원까지만 이주비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제한하고 1주택자는 기존 집을 팔아야만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다주택자는 아예 이주비 대출을 받지 못한다.
문제는 서울 정비사업 조합원 다수가 이런 조건에 걸려 이주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특히 기존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줘야 하거나 이사 갈 전셋집을 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부담이 크다. 조합원들 사이에선 현실을 외면한 탁상행정이라는 반발이 크다.
서울 용산구 한남2구역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곳은 이달 중순 관리처분계획인가를 앞두고 있다. 조합원들은 인가 직후 이주를 시작해야 하지만 대출 규제로 자금이 막히며 비상이 걸렸다. 조합은 지난 12일 임시총회를 열어 이주비 조달 방안을 주요 안건으로 다루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한남2구역 조합 관계자는 “이주비로 세입자 보증금을 돌려주고 나도 새 전셋집을 구해야 하는데 6억원으론 턱없이 부족하다”며 “시공사에 추가 이주비를 요청하는 수밖에 없지만 이미 시공사가 정해진 상태라 실질적 대안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구역은 다주택자 비중이 높고 대출이 막히면 사실상 현금으로 이사를 준비해야 한다”며 “실제 이주가 시작되면 자금 부족으로 발 묶이는 조합원이 속출할 수 있다”고 전했다.
서울에서 사업시행인가를 마치고 관리처분계획인가를 앞둔 정비사업장은 이날 기준 53곳(4만8339가구)에 이른다.
◇ 1+1 분양 신청자 “하루 아침에 대출 막혀”
이번 규제는 ‘1+1 분양’을 선택한 조합원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 1+1은 대형 주택 한 채 대신 소형 두 채를 받는 방식이다. 한 채는 실거주, 다른 한 채는 임대나 자녀 증여용으로 활용하려는 조합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이번 규제로 이들 역시 ‘다주택자’로 분류돼 대출이 원천 차단됐다.
정부는 이번 대출 규제에서 ‘예정 주택 수가 2채 이상인 경우’를 다주택자로 분류했다. 이 때문에 1+1을 신청한 조합원은 실제로 아직 한 채도 받지 않았더라도 다주택자로 간주돼 이주비 대출이 전면 차단된 것이다. 은퇴한 고령 조합원이 많은 1+1 수요층은 현금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아 대출이 막히면 이주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노량진1구역의 경우 전체 조합원 961명 중 절반이 넘는 527명이 1+1 분양을 신청했다. 한남2구역, 가락삼익맨숀, 북아현3구역 등 다른 대형 사업장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서울의 한 정비사업지 조합 임원은 “대출이 나올 거라는 중개사의 말만 믿고 1+1을 신청한 조합원들이 충격에 빠졌다”며 “추가 이주비로 해결하려 해도 금리가 2~3%포인트 높고 시공사가 얼마나 대응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 “추가 이주비, 결국 조합 사업비···조합·시공사 모두 손해”
건설사들도 부담이 커지고 있다. 기본 이주비가 막히면 조합원은 시공사가 제공하는 추가 이주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대우건설은 한남2구역 수주 당시 LTV 150%, 최저 이주비 10억 원, 상환 1년 유예 등의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대출 규제 이후 이런 조건이 유지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추가 이주비는 조합 사업비로 잡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조합원 분담금이 늘어난다”며 “조합도 건설사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고 말했다. 이어 “이주가 늦어지면 착공이 밀리고 결국 주택 공급도 늦어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시와 국토교통부도 이번 사안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정비사업장별 ‘1+1 분양’ 신청 현황을 전수 조사해 국토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주비 대출 제한으로 조합원 피해가 확대되면 정비사업 차질은 물론 주택공급 일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실태를 파악해 필요시 제도 개선을 당국에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 역시 “현장의 혼란과 청원 동향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대출 규제의 영향을 면밀히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정비사업이 주택공급의 한 축인 만큼 정책의 실효성과 현실 간 괴리를 좁히기 위한 보완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정비사업은 행정 인허가부터 이주, 착공까지 단계마다 금융 지원이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구조”라며 “대출 규제가 너무 일괄적으로 적용되면 사업이 멈추고 결국 공급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