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그라든 열기 속 새 정부 ‘디지털자산 제도화’
[시사저널e=송주영 기자] 한때 IT업계의 미래 먹거리로 주목받았던 블록체인. 긴 침묵을 깨고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을까. 새 정부의 디지털자산 제도화 움직임에 블록체인 업계가 술렁거린다.
블록체인은 IBM, 오라클 등 글로벌 기업 뿐만 아니라 삼성SDS, LG CNS, SK텔레콤 등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기술 선점 경쟁을 벌이며 2010년대 중후반 이목을 끌었지만 2025년 현재 사실상 게임 등 소수 업계에만 언급되는 ‘잊힌 기술’로 전락했다. 그러나 최근 출범한 새 정부가 디지털자산의 제도권 편입을 예고하면서 부활 가능성이 높아졌다.
◇ ‘기술 혁신’의 아이콘에서 ‘사라진 존재’로
블록체인은 지난 2020년까지 IT산업의 화두였다. 당시 침체에 빠졌던 IT서비스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기술로 평가받으며 대기업과 스타트업 할 것 없이 관련 프로젝트와 조직 구성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삼성SDS, LG CNS, SK AX는 물론 통신사인 SK텔레콤도 블록체인 시장 공략에 나섰다.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탈중앙화’ 기술을 접목한 파일럿 프로젝트가 잇따랐고 공공기관도 정부 주도의 블록체인 기반 시스템 개발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블록체인은 급격히 자취를 감췄다.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시장의 급등락과 이를 둘러싼 투기 논란 등은 블록체인 기술까지 ‘신뢰받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었다. 정부는 블록체인 기술의 핵심 응용 분야인 암호화폐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고수했고 금융권과 공공부문은 정부 눈치를 봤다. 이 분야에서 관련 프로젝트는 차츰 자취를 감췄다.
한 IT업계 관계자는 “기술 자체는 여전히 유효했지만 코인을 둘러싼 부정적 여론과 규제 리스크가 너무 컸다”며 “결국 사업성이 낮아졌고 인력과 자원이 AI 등 다른 분야로 이동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IT서비스업계에 따르면 삼성SDS와 SK 계열사들이 조직했던 블록체인 전담팀은 이미 해체된 상태다. SK텔레콤도 검토 수준에서 끝났다. 블록체인은 여전히 기반 기술로 남아있지만 신시장 개척의 열기는 사그라들었다. LG CNS만이 제한적으로 관련 프로젝트를 지속하고 있을 뿐이다.
중소 블록체인 스타트업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초창기 암호화폐 거래소 솔루션, 블록체인 기반 결제 시스템 등을 내세웠던 업체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사업 방향을 AI, 보안, 데이터 등 다른 IT 영역으로 전환했다. 블록체인 업체는 늘었다고 했지만 이전같은 관심을 찾기 어렵다.
한 업계 종사자는 “블록체인 기반의 금융 프로젝트가 금융감독 당국의 제재 가능성에 막혀 무산됐다”며 “관련 생태계 기반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전했다.
이처럼 침체기에 빠진 블록체인 업계에 다시 관심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21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재명 정부 디지털자산 제도화를 공약했기 때문이다.
◇ 남은 과제는 ‘신뢰 회복’과 ‘시장 환경 조성’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디지털자산 기본법 제정 ▲대통령 직속 디지털자산위원회 설치 ▲가상자산 현물 ETF(상장지수펀드) 도입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 개발 등을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특히 ‘디지털자산 기본법’은 현재까지 비제도권 영역에 머물고 있는 가상자산을 제도 안으로 편입하겠다는 의미에서 핵심적이다. 현행 체계는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자산이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금융기관이나 공공기관이 기술 도입을 꺼리는 상황이다.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면 기술의 활용 범위가 크게 넓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당 민병덕 의원도 디지털자산 관련 입법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민 의원은 당 내 ‘디지털자산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디지털자산 관련 제도 마련에 나섰다. ‘디지털자산 기본법’ 발의도 준비 중이다. 해당 법안에는 가상자산의 정의와 분류, 투자자 보호 체계, 거래소 관리 방안 등이 담길 전망이다.
업계는 이 같은 변화가 블록체인 기술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본다.
한 IT업계 관계자는 “스테이블코인이나 디지털자산 ETF 모두 블록체인 기술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 자연스럽게 블록체인도 다시 주목받게 될 것”이라며 “특히 금융권에서 시스템 구축 수요가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넘어야 할 산도 많다. 블록체인 기술은 그간의 부침 속에서 신뢰를 잃었고, 기업들의 내부 역량도 약화됐다. 무엇보다 디지털자산에 대한 국민적 시선이 여전히 부정적인 것도 큰 과제다.
이에 따라 업계는 단순한 제도화 외에도 명확한 정책 방향, 교육과 투자, 인프라 구축 등 다각도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 블록체인 스타트업 대표는 “정부가 실효성 있는 법안을 마련하고 시장이 안정적으로 형성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면 블록체인은 다시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규제와 육성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