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DA·EPA 승인 간소화 지시···‘미국산 의약품’ 확대 노려
WTO 무관세 원칙 흔드나···글로벌 제약사 긴장
기능강화 연구까지 금지···중국 기원설 다시 부각
[시사저널e=길해성 기자] 전 세계 제약 산업과 글로벌 의약품 공급망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약품에 품목별 관세를 예고하면서다. 약값 인상 우려에 더해 다국적 제약사와의 무역 갈등 가능성까지 겹치며 파장이 확산되는 양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의약품 제조를 촉진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향후 2주 안에(over the next two weeks) 의약품 관세를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약값과 관련해서도 다음 주에 큰 발표가 있을 것”이라며 미국 내 의약품 가격 구조에 대한 개입도 시사했다.
◇ 의약품 관세 예고…공급망 흔드는 ‘미국 우선주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환경보호국(EPA)에 미국 내 제약 공장 설립과 관련된 승인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라고 지시했다. 행정명령에는 해외 제조시설에 대한 검사 수수료 인상, 유효성분 출처 보고 의무 강화, 보고 미이행 시설 명단 공개 검토 등의 내용도 포함됐다.
이번 조치는 미국 내 제조업 부흥과 중국·유럽 등 외국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정치적 메시지로 해석된다. 현재 미국 의약품 시장에서 원료의약품(API)은 대부분 아시아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완제품은 아일랜드·독일·스위스 등 유럽 국가에서 들여오는 비중이 높다.
특히 외국산 의약품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는 글로벌 제약사들을 겨냥한 압박 조치이자 바이든 행정부의 다자주의적 공급망 전략과 차별화하려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이나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외국에 약을 의존할 수 없다”며 “의약품도 미국 내에서 자체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치의 법적 근거는 무역확장법 232조다. 이 조항은 특정 수입 품목이 미국의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관세 부과나 수입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1차 재임 기간 중 이 조항을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적용해 고율 관세를 부과한 바 있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의약품에 대한 관세 도입을 추진하겠단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지난 4월 상무부에 의약품 수입이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전면적으로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이 조치는 향후 관세 부과의 사전 단계로 해석되며 정치권과 업계에선 실제 발표가 임박했다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현재 미국은 의약품 완제품에 대해 사실상 무관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정과 다자간 무역협정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관세 카드를 꺼내 들면서 수십 년간 유지해 온 글로벌 의약품 무역 질서가 본질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업계에선 이번 정책이 미국 내 제약산업 활성화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단기적으로는 약값 인상과 공급망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의약품 시장의 외국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고율 관세가 현실화될 경우 제네릭(복제약) 공급 차질과 보험재정 부담 가중, 소비자 약값 인상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이번 조치가 단순한 경제 정책을 넘어 대선을 겨냥한 정치적 행보란 분석도 나온다.
◇ ‘기능강화 연구’까지 겨냥…중국 기원설 재소환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날 바이러스의 전염력이나 위험성을 인위적으로 높이는 ‘기능강화’(Gain-of-function) 연구에 정부 예산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단 내용의 또 다른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앞으로는 이런 실험을 해외에서 하더라도 미국 정부의 자금이 투입되지 않도록 막겠단 것이다. 또 미국 내 생물학 실험도 더 안전하게 관리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기능강화 연구는 바이러스나 세균의 전염력이나 치명률을 인위적으로 높여 그 위험성을 파악하고 대비책을 찾기 위한 실험이다. 예를 들어 특정 바이러스가 더 쉽게 사람에게 옮거나 더 치명적인 형태로 변할 수 있는지를 실험실에서 재현하는 방식이다. 이론적으로는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위험한 병원체가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이 기능강화 연구는 특히 논란의 중심에 섰다. 초기 감염이 시작된 중국 우한의 바이러스 연구소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코로나19는 실험실에서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이른바 중국 기원설이 확산된 것이다. 이에 따라 기능강화 연구는 과학적 연구의 필요성과 생물학적 안전 사이에서 논쟁이 이어져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행정명령을 통해 이러한 논란에 직접 대응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조치를 더 빨리 했더라면 팬데믹 같은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코로나19의 중국 기원설을 다시 언급했다. 이는 중국을 겨냥한 정치적 메시지이자 기능강화 연구에 관대한 이전 행정부와는 다른 강경한 입장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