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림무관학교서 독립군 길러···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 및 경제적 지원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했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1919년 3월1일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이어 그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 지사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여줬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오영선 선생은 이념을 넘어 독립운동에 힘을 모으는 민족유일당운동에 힘썼다. 동림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독립군을 길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국무원 비서장으로 직접 참여했다.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국가보훈처와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에 따르면 오영선 선생은 1886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났다. 호는 석농(石農)이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의 둘째 사위다.
오영선은 이동휘가 세운 개성 읍내 사립 보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당시 비밀 결사였던 신민회에 가입해 국권회복운동에 참가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하자 이동휘는 오영선, 계봉우, 김하석, 정창빈, 장기영 등 30여 명을 기독교 포교를 명분으로 대거 북간도로 망명시켰다.
오영선은 1914년 연길현에서 길림성 왕청현 나자구의 대전학교(동림무관학교)로 활동지를 옮겼다. 동림무관학교는 이동휘가 이용익의 아들 이종호 등과 의논해 설립한 무관학교였다. 이 학교는 대한광복군정부의 광복전쟁에 필요한 독립군 장교 양성이 목적이었다.
오 선생은 동림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남북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온 100여 명의 학생들을 교육했다. 그러나 동림무관학교는 1915년 말 간도 일본영사관의 압박을 받은 중국 당국이 학교 폐쇄 조치를 내려 문을 닫았다. 오영선은 일부 학생들을 이끌고 새로운 군사 양성기지를 찾아 훈춘으로 갔다.
동림무관학교 폐쇄 후 이동휘는 1917년 1월 훈춘의 대황구로 가서 북일중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강제 해산된 독립무관학교의 사관양성 활동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영선은 북일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오 선생과 함께 온 학생들도 여기서 교육을 받았다.
오영선 선생이 교육한 많은 학생들이 이후 간도와 연해주에서 항일무장 투쟁을 이끌었다.
1917년 2월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연해주 한인들의 항일활동이 활발해졌다. 1918년 오영선은 남공선, 김립, 장기영 등과 함께 연해주로 갔다.
당시 일본, 영국, 미국 등 제국주의 열강은 러시아 혁명을 방해할 목적으로 1918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간섭군을 파견해 반혁명군인 백위군을 지원했다. 이에 맞서 그동안 이동휘와 오영선 등이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양성한 독립군들도 한인무장부대를 조직해 러시아 혁명군인 적위군과 연합, 각지에서 일본군과 무력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는 1920년 3월 한인 무장부대가 니항(尼港)에서 러시아군대와 연합해 일본군을 전멸시킨 사건을 구실로 연해주 지역 한인 무장부대에 대한 전면적 공격을 했다. 당시 오영선은 아내 이의순이 피신해 있던 이만 부근 한인 마을로 가서 새로운 활동을 모색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및 경제적 지원
오영선 선생은 1920년 연해주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장인인 이동휘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있던 상해로 왔다.
당시 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해 독립을 호소했지만 그동안 벌인 외교 활동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임시정부 안에서는 독립운동의 방법, 임시정부의 비현실적인 조직 등 문제를 두고 불신과 갈등이 깊어졌다. 이에 임시정부를 개혁하자는 논의가 활발했다.
오영선은 1920년 2월 임시의정원에서 경기도의원으로 선출됐다. 9월 2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돼 국무총리 활동을 보좌했다. 이동휘는 자신이 주장한 정부개혁방안이 대통령 이승만과 노동국총판 안창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21년 1월 국무총리를 그만두고 상해를 떠났다. 이에 오영선도 국무원 비서장에서 면직됐다.
1923년 1월에서 6월까지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잘못된 점을 개선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자는 창조파, 국민대표회를 반대하며 임시정부의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정부옹호파가 대립했다. 오영선은 개조파였다. 그러나 1923년 6월 3일 창조파가 자신들만으로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새로운 정부를 건설했다. 이에 그날 오영선은 개조파 56명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탈퇴했다.
오영선은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에도 적극 참여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대한교민단은 상해 지역 임시정부의 지방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 지원 기관이었다. 오영선은 상해에 온 뒤 교민단의 최고 의사 결정기구인 의사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1924년 1월에는 교민단 의사회 학무위원에 선임돼 그해 12월까지 상해 교민의 자제교육을 담당했던 인성학교의 유지와 발전에 노력했다.
오 선생은 1922년 2월 임시정부의 주요 외곽단체인 대한적십자회의 이사장에 선출됐다. 오영선 선생은 적십자회 회비 모금에 적극 참여했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임시정부에 대한 실망이 높아지면서 그동안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인구세, 애국헌금 등의 독립자금이 급격히 줄었다. 임시정부는 정부 청사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가 됐다. 오영선은 임시정부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안창호 등과 함께 정부를 경제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의 활동으로 임시정부의 재정이 나아졌다.
◇ 이념 넘어 독립에 대동단결하는 ‘민족유일당운동’ 힘써
국민대표회의 결렬 뒤 오영선은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정국쇄신운동을 했다. 오영선 등이 구상한 정부개혁 방안은 해외 독립운동의 최대 근거지인 남북만주를 중시하여 정의부를 중심으로 하고 참의·신민부 및 기타 유력한 독립운동 기관과 연립해 정부를 조직하는 방안이었다. 보훈처에 따르면 이를 위해 임시정부의 현상유지만을 고집하며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된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현실과 맞지 않는 헌법을 개정해야 했다.
1924년 12월 박은식을 국무총리로 하는 새 내각이 조직되고 오영선은 임시의정원에서 법무총장으로 선출됐다. 오영선은 박은식 내각과 본격적인 정국쇄신운동에 나섰다. 박은식 내각은 1925년 3월 10일 먼저 임시정부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이승만이 설치한 구미위원부를 폐지했다. 개조파가 다수를 차지한 임시의정원에서도 3월 23일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25일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어 4월 7일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임기 3년의 국무령제로 개정한 개정헌법을 공포했다.
이후 박은식이 1925년 11월 1일 향년 67세로 서거했다.
1926년 중국 관내에서는 민족독립을 위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화된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고 대동단결해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인 대독립당, 즉 민족유일당을 건설하자는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 운동은 중국의 국민당처럼 민족유일당이 임시정부의 상위에서 전투적 독립운동을 벌인다는 ‘이당치국론(以黨治國論)’을 바탕으로 했다.
오영선 선생은 1926년 5월 조상섭, 최창식, 이유필 등과 함께 안공근을 회장으로 하는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했다. 1926년 12월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진회가 결성됐다. 오 선생은 집행위원이 됐다. 이를 전후로 베이징, 광둥, 우한, 난징 등에서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한 촉성회가 잇달아 결성됐다.
김구가 국무령이 된 후 오영선은 김구의 추천으로 국무원 군무장이 됐다. 김구 국무령체제의 임무는 민족유일당을 뒷받침하기 위한 헌법을 개정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은 헌법 개정에 착수해 1927년 3월 5일 ‘신임시약헌’을 공포했다. 이 약헌 제2조 단서 조항에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정당이 완성될 때는 최고 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는 규정을 뒀다.
그러나 민족유일당운동은 1927년 4월 장개석이 일으킨 ‘반공쿠데타’ 이후 독립운동 내부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다. 1929년 10월 상해촉성회가 해산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오영선 선생은 상해에서 병으로 요양하다가 1939년 3월 10일 사망했다.
정부는 1990년 오영선 선생을 독립장에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