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국회에 좌절하다 1심 선고에 억장 무너져
김아련(38)씨는 6년여간 국가와 기업 상대로 지긋지긋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는 가습기살균제 탓에 딸을 잃었다. 아들은 2급 피해자 판정을 받았다. 자식 잃은 엄마는 투사로 돌변했다. 사망자 1112명·피해자 5341명이 나왔지만 사과는 커녕 책임 회피에 급급한 다국적 기업에 분노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한민국 정부에 좌절했다. 징벌적손해배상제 도입을 주저하는 국회에 배신감을 느꼈다.
김씨는 6일 대한민국 사법체계에 좌절해야 했다. 1심 재판부가 책임자들에게 내린 형량은 터무니 없었다. 5년6개월간 사법정의의 실현을 고대했다. 신현우(69) 전 옥시레킷벤키저 대표 징역 7년, 오유진(41) 전 세퓨 대표 징역 7년, 노병용 전 롯데마트 사장 금고 4년 등 죄질에 비해 가벼운 형량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존 리(49) 전 옥시 대표는 증거불충분 등 사유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김씨는 "영국인이 1명이라도 죽었다면 옥시레킷벤키저가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영국 정부가 그런 기업을 그냥 뒀겠는가. 한국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 탓에 6여년이 지나도 정의는 여전히 실현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10일 김씨를 만나 1심 선고 결과에 대한 심경과 대응 방침에 대해 들었다.
둘째 딸 사망 경위는.
2살 딸이 감기 증세를 보였다. 병원에서 데려와 폐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희뿌옜다. 결핵을 의심하고 입원했다. 갖가지 약을 투약했다. 병세는 나아지기는 커녕 악화됐다. 급기야 급성 호흡 부진 탓에 입원 11일 만에 중환자실로 옮겼다. 딸은 스스로 숨쉬지 못해 고통스러워했다. 숨이 막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공포에 질린 눈으로 아빠와 엄마를 바라보는 아기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눈 앞에서 아이가 사지가 묶인 채 숨이 막혀 발악하는 모습을 떠올려봐라. 목구멍에서 가슴까지 호스를 집어 넣어 강제로 숨을 쉬게 해야 했다. 제 딸은 신경안정제도 듣지 않아 맨 정신으로 그 고통을 다 견뎌야 했다. 결국 딸은 인공호흡기를 단 채 떠났다. 처참했다.
1심 선고는 어떻게 생각하나.
재판부가 법리만 따져 판단한 듯하다. 국민 정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사기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이 가해자들을 사기죄로 기소했다. 살인죄를 물어야 하지만 법리상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마저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편취의 목적이 없었다고 설명하더라. 해석의 문제다. 특히 존 리에 대한 무죄 선고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법원은 영국 본사에 있는 핵심 증인들에게 소환장을 보낸 것 말고 추가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피고가 오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국회도 별반 차이 없다.
옥시 배상은 어떻게 진행되나.
지난해 5월20일부터 배상 협의를 개시했다. 1월 31일까지 배상을 신청하라고 하더라. 옥시는 1, 2차 피해자 중 1, 2단계 피해자 상대로 자사 배상안에 따라 배상하겠다고 한다. 개별 피해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피해자마다 케어매니저를 배정했다. 피해자는 피해 정도를 개별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증명 과정이 어렵다. 옥시는 다른 피해자에게도 이런 식으로 받았다며 피해자 권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옥시 영국 본사는 어떤 입장인가.
한국 법인 대표가 공식 사과했다고 밝혔지만 배상이란 표현은 언급하지 않았다. 영국 본사는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 마음 아파 지원하는 것일뿐 법적 책임은 없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일부 피해자는 옥시가 잘못을 인정하고 훨씬 높은 배상액을 제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 피해자들은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영국 본사까지 쫓아가야 했다.
영국 본사는 항의 방문자에게 뭐라고 하던가.
한마디로 치욕스러웠다. 국회 국정조사특위가 영국 법인 조사 당시 영국을 찾아간 피해자 대표 2명에게만 비공식적으로 사과할 수 있다고 하더라. 피해자들은 한국에 들어와 언론 앞에서 공개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옥시 영국 본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개 사과하지 않고 피해자 대표 상대로 사과의 뜻을 낭독하겠다고 하더라. 좋게 말하면 불쌍하게 여기고 나쁘게 말하면 업신여겼다.
국회 가습기살균제 특위 활동은 어떻게 평가하나.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3, 4단계 피해자 지원·도산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등이 가습기살균제 특별법에 포함되길 기대했다. 당초 법안에는 ‘제조업체가 손해액의 10배를 배상한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최종 법안엔 이 조항이 빠졌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구제기금 상한액을 2000억원으로 정했다. 건강보험 비급여도 다루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선 3,4 단계 피해자 지원도 어렵다. 기금만 갖고 피해 지원부터 배상까지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국회가 특별법을 졸속 처리한 탓이다.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는.
국회에 배신감을 느낀다. 국민이 굴욕을 겪고 있음에도 가해 기업에 분담금 내면 징벌제를 빼주겠다는 식으로 접근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개정 등을 재추진해야 한다. 관련자 전원 소환해 진상도 철처히 밝혀야 한다. 검찰도 항소하기를 바란다. 피해자들은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쳤다. 고통스럽고 숨고 싶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으니까 피해자가 나설 수밖에 없다. 환경보건시민센터 같은 비영리기구가 나서야 한다. 그런데 시늉만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처럼 국민적 관심사가 되어야만 해결될 사안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