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안위, 부동산 백지신탁안 제외한 채 공직자윤리법 의결
전문가들 “부동산 백지신탁, 투기 막고 정책 신뢰 높여”
다수 국회의원·고위공직자, 다주택·농지 소유

[시사저널e=이준영 기자] 국회가 고위공직자 투기 방지 핵심으로 꼽히는 ‘부동산 백지신탁’을 외면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위공직자의 지위를 이용한 사적이해 추구 근절 방안으로 부동산 백지신탁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했다.

18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전날 공직자 투기를 막기 위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심사·의결했지만 고위공직자의 부동산 백지신탁 방안은 제외했다. 여당이 3월 국회 최우선 입법과제로 정한 ‘공직자 투기를 막는 공직자 투기 및 부패방지 5법’에서 빠진 것이다.

행안위 관계자는 “고위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 도입이 담긴 개정안은 3월 국회의 공직자윤리법 개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며 “일각에서 재산권 침해라는 우려가 있다. 이 법안이 추후 언제 추진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책 결정자와 부동산의 사적 이해관계 연결고리를 근본적으로 끊기 위해선 고위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밝혔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경제금융부동산학과 교수는 “정책과 정책 결정자의 사적이해 간 연결고리를 제도적으로 끊어야 한다. 부패가 일어난 후 수사하고 처벌하는 것은 근본적 해결이 되지 못한다”며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고위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을 시행해 정책과 정책 결정자의 사적 연결고리를 차단해야한다”고 말했다.

또 “최근 드러난 LH 직원들의 투기는 빙산의 일각이다. 부동산 정책 등을 만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은 더 심할 것으로 추정되며 부동산 정책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도 정책을 만든 사람의 사적 이해가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장은 “고위공직자들은 학연, 지연 등 인적 네트워크가 광범위하고 이를 통해 각종 개발정보가 공유된다고 본다”며 “이들의 실소유 외 부동산에 대해 백지신탁하게 하면 지위를 이용한 투기를 막을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사적 이해관계 없이 공정한 정책을 만들어 부동산 정책 신뢰도가 올라간다”고 말했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부동산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하지만 핵심인 고위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이 시행되지 않고 있다”며 “이 제도는 상층 권력집단이 특권을 내려놓게 하는 프로젝트다”고 했다.

현재 공직자윤리법에는 주식 백지신탁제도가 도입돼있다. 공직자가 직무 관련 주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 이를 매각하거나 백지신탁 하도록 해 공무와 사적 이익 간 이해충돌 가능성을 막고 국정 수행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고위공직자의 부동산과 관련된 신탁제도는 도입 필요성 제기에도 번번이 무산됐다. 지난해 7월 신정훈 민주당 의원과 행안위 간사인 한병도 의원 등이 함께 고위공직자 부동산의 매각 또는 백지신탁이 담긴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발의 했으나 계류 중이다.

이 개정안은 고위공직자가 실제로 거주하는 부동산을 제외한 나머지 부동산을 매각하거나 백지신탁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대상은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국회의원, 국가정보원 원장 및 차장, 지자체장 지방의회의원, 지자체 정무직 공무원, 일반직 1급 국가공무원, 부장판사급 이상 법관과 대검찰청 검사급 이상 검사, 공기업 장과 부기관장 및 상임감사, 한국은행 총재·부총재·감사 등이다. 이들 배우자와 본인의 직계존속 및 직계비속도 대상이다. 수탁기관은 신탁된 부동산에 대해 180일 이내에 처분하고 고위공직자는 신탁재산의 관리·운용·처분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미지=이다인 디자이너
이미지=이다인 디자이너

신탁된 부동산이 처분되면 고위공직자는 부동산 감정평가액과 법정이자 더한 금액을 지급받는다. 매각 금액과 매각 때까지 수익을 합한 금액이 신탁시점 해당 부동산의 감정평가액에 법정이자를 더한 금액을 초과한 경우 차익은 국고로 귀속한다.

부동산 백지신탁 도입이 무산되는 것은 국회의원들과 고위공지작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현재 여러 국회의원들과 고위공직자들이 다주택자거나 농지를 소유하고 있다.

지난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밝힌 바에 에 따르면 국회의원 25%, 고위공직자 40%가 농지를 소유하고 있다. 21대 국회의원 300명 본인과 배우자가 소유한 농지는 1인당 평균 약 1592평(0.52㏊)로 1억7500만원 규모다. 경실련은 “우리나라 농가의 48%에 해당하는 48만7118호가 경지가 없거나 0.5㏊ 이하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의원들의 소유 규모는 작지 않은 수준이다”며 농지 소유 및 이용 관련 정책 결정과 입법을 담당하는 국회의원과 고위공직자의 농지 소유는 이해충돌 여지가 있으며 투기나 직불금 부당수령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했다.

지난해 6월 경실련 발표에 따르면 21대 국회의원 10명 중 3명은 주택 2채 이상을 보유한 다주택자였다.

정치권 관계자는 “일부에서는 고위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이 재산권 침해라는 인식이 있다”고 했다.

이에 남기업 소장은 “고위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은 재산권 침해가 아니다. 부동산 처분 시 감정가와 이자를 지급한다”며 “이 제도는 고위공직자가 지위를 이용한 투기를 막고 우리 사회의 부동산 투기를 막는 시작이다. 또한 정책 결정의 공정성과 국민 신뢰를 높인다는 점에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했다.

전 교수는 “의원들과 고위공직자들은 부동산 백지신탁이 도입되면 재산권의 제약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동산 백지신탁으로 정책과 사적 이해관계 고리를 근본적으로 끊어버리면 인사권자와 고위공직자 후보도 곤혹을 치르지 않고 국민들도 공직자 부패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또 “고위공직자들이 직무를 이용해 불로소득을 취하는 것을 막아야한다”고 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고위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이 도입되면 공직자의 투기 방지 뿐 아니라 부동산 투기가 만연한 사회문화 개선에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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