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조사만 열심히 하고 싶었던 교통안전공단 책임연구원…누가 가로막았나

아래 세 장면은 모두 허구다.

  

S1# 양재동 개고기 집

 

오전에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오후가 되자 거세졌다. 양재동 청계산 자락에서 개고기집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차양을 쳤다. 벌써 장마가 일주일 째 이어졌다. 에어컨을 켜고 선풍기를 돌려도 가게 내부가 눅눅했다. 20짜리 국통에서 펄펄 끓는 개고기와 닭고기 냄새가 비 냄새와 서로 엉켰다. 김씨는 20년간 맡아온 냄새가 이날따라 왠지 역했다. 장마가 지속되자 청계산의 푸른 내음이 비린내로 바뀌기 시작했다.

 

 

김성진 기자.
시계가 오후 530분을 가리켰다. 예약손님 5명 중 2명이 정시에 도착했다. 둘은 늘 그렇듯 가게 구석에 별도로 마련된 공간으로 들어섰다. 한 명은 물을 따르고 다른 한 명은 수저와 젓가락을 다섯 짝을 식탁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잠시 후 3명이 뒤늦게 도착했고, 5명은 소주 2병을 추가로 주문했다.

 

김씨는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자동차 회사에서 근무하는 것 같았는데,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 꼭 5명이 여기서 모였다. 다만 그들 사이의 권력관계는 대충 눈치 챌 수 있었다. 1명이 말하자 다른 4명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목소리가 컸던 그 사람은 상 건너편 사람에게 “ABS(바퀴잠김방지식 제동장치), 이게 무슨 결함이야 도대체. 이거 우린 결함 인정 못 하니까 리콜 안 되게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누군가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기 너머로 화성 날씨는 어떠냐고 묻더니 다음 주에 몸보신 한 번 하자고 했다.

 

S2#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삼존로 200

 

2013XXXX.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삼존로 200에 위치한 자동차안전연구원. J가 자동차결함정책실장으로 부임한 지 6개월이 지났다. J는 교통안전공단에 입사한 지 30년도 넘은 베테랑이다. 여러 부서를 거치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이제는 사람이든 일이든 한 번 보면 파악이 다 됐다.

 

J는 조직 내부뿐 아니라 외부 관계를 조율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지를 땐 지르면서도 적당히 뭉갤 줄도 알았다. 입사 초기 가슴 한 켠에 간직했던 소신은 지난 세월에 놓고 왔다. 전통이든 폐습이든 예전부터 이어오던 것들을 흘러가는 대로 놔뒀다. 그게 업무에 있어서 더 편하고 효율적이었다. J가 터득한 노하우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부서에 눈엣 가시 같은 녀석이 한 명 있다. 이 녀석은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모르는 것 같았다. 지겹게도 원리 원칙을 따졌다. 어르고 달래봤지만 헛수고였다. 소위 어른들의 세상을 몰랐다. ABS인지 뭔지 자꾸만 브레이크 결함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J는 이 녀석의 꼬투리를 잡아 경위서를 쓰게 했다. 이러면 좀 관리가 될까 싶었다. J는 말없이 사무실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했다.

 

S3# 서정대학교

 

폭우가 쏟아졌다. 박진혁 전 교통안전공단 책임연구원의 연구실을 찾은 날이었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앞유리를 닦았지만 쏟아지는 물줄기에 시야가 가렸다. 앞에 달리는 차량의 형체가 흐릿하게만 인식됐다. 혹여라도 차가 미끄러질까 가슴 졸이며 박 전 연구원이 교수로 재직 중인 서정대학교로 향했다.

 

박 전 연구원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이어도 근거가 없으면 조심스러워 했다. 다만 팩트가 뒷받침되는 사안에 있어선 거침이 없었다. 그의 기억력은 거의 정확했다. 나중에 문서로 확인해 봤을 때, 그가 설명한 내용들은 대부분 다 들어맞았다. 박 전 연구원은 꼼꼼하고 치밀했다.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을 것 같은 타입이었다.

 

그런데 박 전 연구원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인상적으로 남는 부분은 그가 제시한 뚜렷한 근거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팩트와 관계없이 그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박 전 연구원은 나는 단지 조사를 정말 열심히 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연구실에는 창문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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