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복지公 상대로 협력사 현장소장 유족 승소…20번째 삼성전자 피해 인정 사례, 반도체 산업 전체로는 24번째

산업현장의 클린룸과 동일하게 설계된 서울대학교 반도체공동연구소 내 클린룸. 라인 내 공기가 외부 공기와 혼합되지 않은 채 내부 공기가 바닥의 미세한 구멍을 통해 공기가 위에서 아래로 순환하는 구조로 지속적으로 재유입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사진제공=고(故) 손경주씨 유족


삼성전자 반도체 작업장에서 불치병을 얻어 숨진 노동자에게 산업재해를 인정하라는 법원 판결이 또 나왔다. 삼성전자 작업장 피해자로서는 20번째, 삼성 외 기업까지 포함해 반도체 작업장 피해자로서는 24번째 사례다.


특히 피해자가 재해 발생지로 지목된 ‘클린룸’에서 상시 근무했던 엔지니어가 아닌, 클린룸을 오가며 엔지니어들을 관리했던 ‘현장소장’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재판장 김정숙 부장판사)는 17일 삼성전자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 손경주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해 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19일 밝혔다.

손씨는 2003년 1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삼성전자 화성공장(12, 13라인)에서 설비 유지보수업무(Preventive Maintenance·PM)를 맡은 하청업체 M사의 현장소장이었다. 그는 2004년 11월부터 2009년 5월까지 삼성전자 기흥공장(14, S1라인)에서 하청업체 G사의 현장소장으로도 근무했다.

PM업무는 시기적으로 ‘신규 구축 라인의 초기 안정화단계’와 ‘안정화 이후에 양산체제에 돌입된 단계’로 나뉘는데, 손씨는 하청업체 두 곳을 거치면서 총 네 개의 신규 라인의 초기 안정화단계 업무와 기흥공장 두 개 라인의 양산단계 업무를 수행했다.

유족에 따르면 손씨는 근무 중 대부분 시간(1일 6~8시간)을 클린룸 내에 상주하거나 패트롤(patrol) 했다. 안전 점검을 위해서는 패트롤이 상시적으로 요구됐고, 작업 사고 시 긴급조치 및 복구과정을 지도·감독하기 위해 현장소장이 직접 특정 ‘베이’에 몇 시간씩 머무는 일도 많았다. ‘베이’는 특정 공정을 수행하는 단위로, 라인 하나는 수십 개의 베이로 구성돼 있다.

손씨는 2009년 5월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이 발병했다. 당시 손씨는 갑작스레 살이 많이 빠졌는데 주변에서는 “몸 생각해라” “일에 너무 빠지지 말아라”는 조언까지 했다고 한다. 손씨는 다행히 치료를 마치고 2010년 8월 업무에 복귀했으나, 2012년 1월 돌연 병이 재발해 7개월 만에 숨졌다.

이 사건의 쟁점은 손씨가 클린룸에 얼마나 출입했는지 여부였다. 사측은 손씨가 현장소장으로서 하루 2~3시간만 출입해 위험물질 등에 노출됐을 시간이 짧았다고 주장했으나, 유족 측은 고인이 수개월 간 하루 8시간 이상 클린룸에 머물며 관리·교육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 대리인을 맡은 법무법인 ‘여는’의 박다혜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근로복지공단은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상황에서 별다른 재해조사를 하지도 않았고, 일방적으로 삼성 측의 출입기록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유족은 뒤늦게 산업재해가 인정된 부분에 대해 지난 정부에 간접적으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손씨의 아들 성배씨는 “산재 인정이 너무 오래 걸렸다. 공단 측은 심사 과정에서 유족의 의견을 거의 듣지 않는 등 불성실하게 대응했다”면서 “박근혜 정부 산하 적폐 근로공단이 불승인한 산업재해를 문재인 촛불 법원이 인정해 준 것 같다”고 말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를 표방한 시민단체 ‘반올림’에 따르면 2007년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 측의 유족급여신청 사건 이후 손씨의 사건까지 총 24명이 산재 인정을 받았다.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에서 직업병으로 인정된 병명은 8가지로 난소암,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 다발성경화증, 유방암, 뇌종양, 다발성신경병증, 악성림프종 등이다.

반올림에 제보된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는 지난 5월 기준 총 383건에 이른다. 삼성전자 반도체와 LCD 등 DS 부분의 피해 제보가 230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 밖에 휴대폰, TV브라운관 제조 검수 과정에서도 질병이 발생했다고 반올림은 주장한다. 제보자 중 141명은 이미 숨을 거뒀다.

피해가 접수된 사업장으로는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SDI, 테크원(현 한화테크윈) 등 삼성 계열이 가장 많다. 비 삼성 계열 회사로는 하이닉스, 매그나칩, ATK, 페어차일드, 서울반도체, LG디스플레이, LG전자 등이 있다. 직업병 피해를 유발한 것으로 추측되는 일부 공정은 중국 등 해외로 이전됐지만, 잠정적 피해 요소는 여전히 남아있다.

반면 삼성전자 등은 클린룸의 안전성을 확신하는 입장이다. 삼성전자 측은 2015년 10월 배포한 자료에서 “반도체 산업은 최첨단 제조업으로 어떤 업종보다 안전하다”면서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라인의 안정성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2월 외신 간담회에서는 삼성이 대한민국에서 갖는 독특한 지위 때문에 직업병 문제가 발생한다는 취지로 주장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공식적으로 산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사회적 부조’라는 차원에서 피해자 보상을 진행하고 있다. 실제 삼성전자는 2015년 7월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에 따라 1000억원의 사내 기금을 조성하고 희소병으로 퇴직한 근로자에 보상과 예방활동을 펼치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까지 약 120여명에게 보상액을 지급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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