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세대 이익만 챙기기보다 후손을 배려하는 지혜…경제적 가치만큼 중요한 환경·사회적 가치

시간 날 때마다 다시보기로 꼭 챙겨보는 TV프로가 하나 있다. ‘사람과 사람들’이라는 프로다. 

 

무엇보다 이 프로를 보노라면 사람냄새가 나서 좋다. "따뜻함과 인정, 사랑과 배려, 이웃과 함께"라는 요즘 세상에서 만나기 힘든 이런 단어들과도 마주하게 된다. 이 프로 중 언젠가 봤던 '영산도의 세 남자'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영산도는 외딴섬이다. 목포에서 2시간 가면 흑산도, 또 거기서도 20여분 더 가야 하는 오지 중 오지다. 그 섬에는 약 4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주민 대부분은 육십 대 이상의 할머니들인데 그들 중 이장을 맡고 있는 한 아저씨와 나머지 둘 포함, 세 남자가 할머니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이 세 남자가 섬의 온갖 궂은 일들을 도맡아 한다. 이 프로는 이들의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을 정겹게 담아냈다.


오지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영산도의 자연경관은 참 아름답다. 산과 섬, 푸른 바다의 어울림도 절묘했다. 그리고 아직도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이다. 그 이장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이 남아 있다. "이 섬은 정말 아름답고 살기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곳에서 살면서 늘 염두에 두는 것은, 이 아름다움을 우리 손자세대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줘야 한다는 점입니다."

최근 들어 영산도의 절경이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들어오지만, 이 섬에서는 주민들의 합의에 따라 입도객의 숫자를 항상 오십명 이내로 엄격히 제한한단다. 섬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지금 모습 그대로 훼손하지 않고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기 위해서다. 또한 이 섬 주변 갯바위에는 자연산 홍합들이 자라는데, 이들은 지속 가능성을 위해 3년에 한번 그것을 채취할 뿐더러, 채취할 때도 엄격히 그 수량을 제한한다. 당장 현재 세대의 호주머니만 생각하지 않고, 손자들에게도 그 경제적 기회와 혜택을 물려주기 위한 까닭이다.

이쯤 프로를 보다보니, 오래 전 내 경험이 떠올랐다. 나는 십여 년전 가족과 함께 유럽인들이 최고로 치는 휴양지 중 하나인 스위스의 베르비에(Verbier)를 다녀왔다. 제네바 공항에서 차로 2시간 거리, 눈앞에 거대한 알프스 산자락이 펼쳐질 무렵 우리가 탄 차는 급경사와 급커브를 돌아 그곳에 도착했다. 하늘의 초입에 위치한 듯, 신이 직접 빚어 놓은 듯하다는 유럽인들의 찬사가 허풍만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날 나는 개인적인 용무로 거제도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을 갓 벗어날 즈음만 해도 내겐 아직 베르비에의 잔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디쯤 다다랐을까. 그 잔영은 사라지고 내 눈에는 서서히 우리의 산하가 밀려 들어왔다. 어디든 강이나 하천이 흐르고, 적당한 높이의 산이 서 있고, 길은 높낮이를 달리하여 곡선의 유려함을 파노라마처럼 쏟아냈다. 나는 우리 산하의 경치에 취해 시차가 있었음에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러나 베르비에와 우리 산하는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베르비에가 자연 친화적으로 개발된 데 비해, 우리 산하 곳곳은 파헤쳐져 있었고, 수많은 입간판들과 공장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그 본래의 아름다움이 반감되었다. 


영산도와 베르비에의 개발방식이 서로 닮은꼴이었다면, 우리나라 산하는 현세대의 이익을 위해 다른 방식으로 개발되어 왔다. 즉 다음세대에 대한 고려는 언감생심이고, 부의 창출을 위해서라면 자연보존이나 지속가능한 개발의 가치는 뒷전으로 밀렸다. 현세대가 자연환경을 독점적으로 소유권하고 있다는 판단 하에, 현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또한 단기관점에서의 비용 편익분석을 거친 수익성만 예상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파헤치고 깎아내고 그 자리에 무언가를 짓고 쌓고 세웠다.

이러한 우리들의 인식에 경종을 울리고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사례가 있다. 노르웨이는 1969년 북해에서 대규모 유전을 발견했다. 그 유전은 1971년부터 노르웨이에 막대한 원유수입을 가져다주며, 국가재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수익을 창출하던 초기부터 이들은 자연이 가져다준 경제적 축복을 70년대를 사는 노르웨이 국민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다음 세대와 공유해야 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자연자원의 소유권은 현 세대와 다음 세대의 공동소유라는 인식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유전개발 수익금을 재원으로 GPFG라는 국부펀드를 설립했다. 현재 그 운용규모는 우리 돈으로 1160조원에 달한다. 이들은 이 펀드를 인구 고령화에 따른 사회안전망 확충 및 보건복지사업 분야에 대한 투자재원으로 활용한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책임투자 방식으로 운용함은 물론이다. 현재의 노르웨이가 전 세계적으로 선진 복지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40여년 전 그들 선조들의 다음세대에 대한 친절한 배려와 긴 안목이 자리 잡고 있다.

개발은 불가피하다. 더욱이 땅덩어리가 비좁은 우리의 경우 개발논리가 상대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중첩적 경제개발 과정에서, 자연환경이나 사회적 가치들을 후순위로 내몰았던 우리들의 고단한 역사가 그 불가피성을 변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젠 그런 논리들은 폐기해야 한다. 그 대신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환경적, 사회적 가치들을 나란히 함께 세워 놓아야 한다. 환경의 훼손은 쉽사리 복원가능하지도 않으며, 무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 후손들도 오늘날 스위스 베르비에 주민들이 갖는 자연자원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해야 한다. 지금 우리들의 선택에 따라서 우리의 산하는 그리하고도 남을 잠재력이 있다. 

 

영산도에도 곧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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