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통화 공급 지속…부자들 환호하나 서민 부담 커져

며칠 전 대학에 다니는 아이가 대만 여행을 다녀왔다. 돌아온 아이가 꺼낸 첫 마디는 “대만 물가가 싸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선 기숙사 방 한 칸을 두세 명이 써도 월 35만원을 내야 하는데 대만에선 30만원으로 독방을 쓴다고 했다. 게다가 요가강습 등 다양한 문화생활 혜택도 공짜라고 했다.


음식 값 또한 한국에 비해 싸다고 했다. 한국 돈으로 3000원이면 다양한 음식을 골라서 먹을 수 있고, 2만원이면 꽤 근사한 만찬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술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맥주가 싸다며 귀국길에 캔을 들고 왔을 정도니 더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상대적으로 대만에서 한국 유학을 온 학생들은 한국 물가에 놀란다. 생활비가 의외로 많이 들어가서다. 그런데 일본인들도 한국 물가가 비싸다고 한다. 일본 벤처투자회사의 한 임원은 “한국 채소나 과일은 일본보다 싼데 음식 값은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오히려 높다”고 말했다.

◇내집 마련 꿈 앗아가는 인플레이션


한국은 경제 수준에 비해 물가가 비싼 편이다. 한국의 1인당 GDP는 2만9214달러로 3만8281달러인 일본의 76% 수준이다. 같은 물건이라도 그만큼 싸야 한다. 그런데 한국 쪽이 오히려 비싼 게 적지 않다. 당연히 소비자들의 부담이 그만큼 크다. 특히 삶의 필수 요소 중 하나인 주택 마련 비용은 거의 허리를 휘게 한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3월 기준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6억17만원이다. 한강 남쪽 11개구 아파트 평균가는 7억2343만원이나 된다. 월급쟁이가 돈 모아 강남에 진입하는 건 언감생심, 꿈에서나 겨우 그려볼 정도가 됐다.


특히 상위 20% 아파트 값은 12억원을 넘었다. 1년에 4000만원씩 모아도 30년 넘게 걸린다. 월급 받아 그런 집에서 산다는 건 불가능한 목표가 돼 버렸다.
 

물론 지금 고급 아파트 사는 사람들이 모두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아 들어간 건 아니다. 그들 중에도 월급 모아 그런 아파트를 장만한 이들이 적지 않다. 문제는 그들이 아파트 장만할 때와 지금 상황이 너무나 달라졌다는 데 있다.

◇물가 오르는 만큼 서민들은 뜯겨

20년 전만 해도 물가가 아주 비싸지 않았고 금리는 높아 저축해서 내집 장만할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작은 집을 산 뒤 몇 번 이사 다니다 보면 지금은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집도 살 수 있었다. 


그 꿈을 앗아간 게 인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은 자산이 많은 부자들의 부를 계속 불려준다. 또 없는 사람들이 부자 대열에 들어가지 못하게 장벽을 만들 뿐 아니라, 그 장벽을 계속 높이는 효과까지 갖고 있다. 월급이 아주 높아지지 않는 한 오르는 물가 따라가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민들도 꼭 써야하는 필수품 물가는 더 빠른 속도로 올라간다. 통계로 잡히는 물가와 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물가의 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그래서다.
 

아파트 값만 해도 정책당국과 서민들의 생각 사이에는 큰 골이 있다. 사람들 빠져나가는 시골 집값 떨어지는 건 서민들에겐 의미 없는 숫자일 뿐이다. 서민들은 일자리 많은 도시의 아파트값 치솟는 걸 고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심각한 것은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란 데 있다. 인플레이션이 가난한 이의 호주머니 돈을 빼서 부자에게 넘겨주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빵값, 커피값 올려 이익을 늘리는 만큼 서민들 호주머니 돈은 빨리 줄어든다. 은퇴자들의 퇴직금 줄어드는 속도 또한 물가 올라가는 것에 비례해 빨라진다.

◇한은 당분간 인플레이션 용인할 듯

진짜 우려되는 건 앞으로 물가상승률이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이 물가에 대해 낙관하고 있는 게 우선 조심스럽다. 한은은 지난 4월 금통위에서 “국내경제의 성장세가 완만하여 수요 측면에서의 물가상승 압력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므로 통화정책의 완화기조를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당분간 물가 신경 쓰지 않고 돈을 풀겠다는 뜻이다.


부자들은 이런 정책을 두 손을 들어 반긴다. 가만히 있어도 재산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없는 이들에게 인플레이션은 가뜩이나 가벼운 호주머니까지 털어가는 날강도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가벼운 인플레이션은 가랑비가 옷을 적시듯 서민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야금야금 쌈짓돈마저 뜯어간다.
 

그런데도 인플레이션 문제를 지적하는 정치인은 흔치 않다. 설명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인플레이션 억제책을 쓰다가 자칫 성장률이라도 떨어지면 반발이 심하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 이후 물가를 제대로 잡은 정부가 없는 것도 그래서다.
 

결국 인플레이션 방어는 국민 개개인의 몫이 돼버렸다. 대출을 받아서라도 주식이나 부동산을 사둬야 물가 때문에 뜯기는 걸 보충할 수 있다. 가계대출이 급증한 것도 그런 측면에선 납득이 간다.
 

그런데 차기 정부가 서민대출을 통제할 가능성이 크다. 가계대출이 과도하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서민들은 인플레이션 방어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부자의 꿈을 접어야 하는 건 인플레이션 시대를 사는 서민들의 숙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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