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말하기 시작한 1등 방산기업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매출 30조원, 영업이익 3조원.”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달라졌다. 그동안 좀처럼 말을 아꼈던 기업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8일 열린 미래 비전 설명회 자리에서 회사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연간 실적 가이던스를 제시했다. 기존 증권가 전망치보다 한참 높은 수치다.
얼핏 보면 단순한 숫자 나열 같지만, 이 안에 담긴 의미는 작지 않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방산 기업이다. 무기체계 수출, 함정 계약 등 대부분 사업이 국가와 직접 얽혀 있고, 보안이 핵심이다. 실제로 이 회사는 그간 주요 수주 성과나 연간 전망을 잘 공개하지 않았다. 수주 계약이 이어져도 “보안상 구체적 내용을 밝히기 어렵다”는 말을 반복해왔다.
이런 회사가 실적 전망을 내놨다. 그것도 ‘경영권 승계 논란’을 해소하는 중요한 무대에서였다. 오늘 ‘깜짝’ 행보는 단순한 숫자 공개 이상으로 해석된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 번째는 주주와의 소통이다. 국내외 기관투자자, 소액주주들은 그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 가장 아쉬운 점으로 ‘정보 비대칭’을 꼽아 왔다. “예측이 어렵고, 중장기 계획이 불투명하다”는 불만이 컸다. 이 때문에 실적이 기대 이상이어도 시장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가이던스 발표는 시장과의 접점을 늘리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두 번째는 글로벌 기준과의 거리 좁히기다. 세계 1위 방산기업 록히드마틴은 매년 실적 가이던스를 발표한다. 2024년 매출은 680억달러, 영업이익은 70억달러가 목표라는 식이다. 보잉도 마찬가지다. 주주와 시장을 향해 숫자로 신뢰를 쌓는 것이다.
국내 방산기업들도 덩치가 커지면서 점차 글로벌 투자자들의 레이더에 들어가고 있다. 수출을 늘리고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려면 구체적인 정보 관리 기준도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제 실적 가이던스 제시와 같은 시장 친화적 소통 방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이번 발표만으로 ‘투명한 기업’이라 하긴 어렵다. 가이던스 수치의 근거는 따로 설명되지 않았다. 연례 발표로 이어질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유상증자 구조를 바꾸며 주주 설득에 나섰고, 이제는 실적 가이던스까지 공개하며 ‘정보를 내놓는 기업’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안병철 전략총괄 사장은 “유상증자 논란을 통해 뼈저리게 반성했다”며 “주주가치 제고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번 발표가 일회성인지, 새로운 기준의 출발점인지는 앞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