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ISSCC 반도체 설계학회서 논문채택 비중 급증
생산 넘어 고급기술 영역에서도 한·미 등 강국 압도
산학계 “한국도 반도체 부문 적극적인 정책 투자 시급”
[시사저널e=고명훈 기자]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반도체 생산 뿐 아니라 설계역량도 한국, 미국 등 반도체 강국을 압도하며 높은 성장세를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중국은 미국의 반도체 제제 영향으로 사업영역 자체가 레거시(구형)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극복했다. 당초 중국의 반도체산업 성장이 제한적일 것으로 판단해왔는데, 최근엔 이런 예상과 달리 빠르게 성장했단 평가다.
◇세계 최고 권위 반도체 설계 학회에서 中 논문채택 압도적 1위
3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내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 2025’에서 중국이 제출한 논문 수는 600편에 달한다. 전체 논문 채택 수 246편 가운데서도 중국은 92편으로, 3년 연속 최다 논문 채택 국가에 올랐다. 전년(63편)보다 23편이나 증가했으며, 2, 3위인 미국, 한국과의 격차도 더 크게 벌어졌다. 미국은 전년 51편에서 이번에 55편으로 소폭 증가했고, 같은 기간 한국은 49편에서 44편으로 오히려 줄었다.
ISSCC는 반도체 설계 부문 세계 최고 권위의 학회로, ‘반도체 설계의 올림픽’이라고도 불린다.
반도체 회로설계는 침의 성능, 전력 효율, 비용 등을 결정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인공지능(AI) 산업 발전으로 칩 설계역량에 대한 중요성이 커졌으며 전체 반도체 분야 중 석박사급 고급인력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분야다. 시스템반도체 설계역량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고, 국가별로 관련 인재양성에 투자 경쟁이 펼쳐진다.
ISSCC에서 중국은 미국의 직접적인 제재 영향권에 있는 산업계보단 학계를 중심으로 논문 제출 및 채택 수가 급격히 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 북경대는 이번 ISSCC에서 15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학계 논문 채택 수 1위를 차지했다. 중국 마카오대(14편), 칭화대(13편) 등도 한국 카이스트(12편), 미국 버클리대(6편) 등을 제치고 순위권에 올랐다.
최재혁 서울대 교수는 “중국은 세계 유명한 반도체 교수들과 우수한 학생들을 대거 영입하고 있다”며 “중국은 미국의 정책 때문에 반도체 내재화에 대한 노력과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 특히 학계에서 만드는 건 정부 차원에서 모두 무상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논문 제출 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특히, 미래 반도체 기술의 방향성이 제시되는 테크놀로지 디렉션(TD) 분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전년 채택 논문 수가 2편에 불과했지만, 이번엔 총 7편이 채택됐다. 반면, 한국은 전년에 이어 이번에도 한편도 채택되지 못했다.
제민규 카이스트 교수는 “중국이 미국의 선단 공정 규제로 지금 꼭 필요한 부분에 대해선 막혀있는 상황인데, 만약 이 부분까지 내재화하는 데 성공하면 대변혁이 일어날 것”이라며, “현재 중국 기술 수준의 발전 속도를 봤을 때 성공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고 지적했다.
◇중국 팹리스, 글로벌에서 두각···세계 10위권 진입도
중국 팹리스 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중국 현지 팹리스는 총 3400~3800곳에 달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윌세미컨덕터가 지난해 매출 기준 글로벌 팹리스 점유율에서 9위를 차지하면서 톱10 순위권 안에 들었다. 윌세미컨덕터는 지난 2018년과 2019년 CIS(CMOS 이미지센서) 설계업체인 베이징슈퍼픽스, 대만 옴니비전을 각각 인수하면서 CIS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업이다.
화웨이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은 비록 비상장 회사이지만, 지난 2020년 상반기까진 글로벌 모바일 AP 시장에서 퀄컴과 미디어텍에 이어 3위를 기록한 바 있다. 당시 TSMC의 5나노 공정을 활용한 ‘기린 9000’ AP를 개발해 화웨이 플래그십폰에 탑재했지만, 미국 제재로 생산이 막히기도 했다. 이외에도 하이곤은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 사업에 주력 중인 팹리스로, 윌세미를 넘어 중국 상장기업 시가총액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병인 한중시스템IC협력연구원 원장은 “지난 2021년부터 작년까지 3년 새 중국 회로설계 인건비가 2배 정도 늘었다. 앞서 2018년과 2021년을 비교해봐도 이미 3배 이상 오른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 정부 지원을 못받거나 상장을 못한 팹리스들은 매출을 끌어올리지 못해 문을 닫은 곳들도 많다”며 “지금 남아있는 팹리스들은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추고 있단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중국 벤처업계에도 파운드리, 소재, 장비회사에 투자가 집중되고 있어 팹리스 산업의 경우 어느 정도 성숙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파악된다. 더 이상 크게 늘지도, 줄지도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은 일하기 열악한 환경···정책적 지원 절실
한국은 반도체 산업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 정책 지원과 투자가 절실하다. 반도체산업을 주 52시간 근무제에서 배제하는 등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앞서 지난달 국민의힘에서 반도체 연구개발 업무 종사자에겐 ‘근로시간 특례’를 둬서 주 52시간 상한 규제를 적용받지 않도록 하는 반도체 특별법안을 당론으로 발의했지만, 여야 합의 불발로 국회 본회의 처리가 무산됐다.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해당 조항을 유지할지, 삭제할지논의 중이다.
최 교수는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인구도 25배 많고 교수도 25배 많고 학생도 25배 많은데 일하는 시간도 훨씬 길다. 회로라는 건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최적화를 해야 하는 건데 우리가 한번에 하나 만드는 걸 중국에선 50개를 만드는 것과 같다”며 “결국 경쟁에서 이기려면 고부가 제품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사람, 시간 모두 한계가 있다. 워라밸만 강조하고, 다 같이 일하지 말자고 한다면 고착화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