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기만 한 모래놀이터 입성 문턱···혁신사업 발목 잡는다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수소,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을 활용한 혁신사업을 하는 기업들은 관련 법이 마련되지 않거나 현행 규제에 막혀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기업들이 시장 진출을 할 수 있도록 규제 샌드박스가 활로를 터주는 역할을 한다. 모래 놀이터를 뜻하는 샌드박스는 기업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일정 기간 규제를 유예해주는 제도다.
액화수소 관련 기업들도 규제 샌드박스 제도 덕에 사업에 첫발을 뗐다. 국내 액화수소 사용사례가 없어 관련 법이 없는 까닭이다. 제도적 혜택을 얻은 쪽은 대부분 대기업이다. SK E&S, 효성중공업, 두산에너빌리티는 액화수소 생산을, CJ대한통운은 액화수소 운송을 담당한다.
수천억을 쏟아부어 거창하게 시작했던 액화수소 사업은 ‘돈 먹는 하마’라는 오명만 얻었다. 사업을 추진 중인 기업들은 대규모 부지에 비싼 액화 장비를 들여놨지만, 시운전 단계에서 상업 가동으로 넘어가질 못하고 있다.
규제 샌드박스 심의에 통과한 대기업들과 달리 액화수소 수요처들에겐 규제 샌드박스 문턱이 꽤나 높다고 한다. 전문 법무팀을 둘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들은 규제 샌드박스 심의를 받기 위한 서류 제출 단계부터 진땀을 빼기 일쑤라는 것.
규제 샌드박스 심의에서 통과까지도 하세월이다. 오죽하면 “심의받다 사업 망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액화수소 수급을 받고 싶어도 준비하는 데 들어가는 인력, 시간은 부담”이라며 “통상적으로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이 걸린다”고 토로했다.
사업성도 확보되지 않은 모래 놀이터로 들어가는 데만 2년. 놀이터 이용 기간인 특례기간도 4년으로 짧다. “규제 샌드박스는 모래 놀이터가 아닌 울퉁불퉁한 자갈밭이 돼 버렸다”는 게 일부 액화수소 산업쪽 관계자들의 평가다.
국내 1호 액화수소플랜트 운영업체인 ‘하이창원’은 내년 액화수소 수요처로 단 2곳을 확보했다. 공장을 준공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정작 액화수소를 수급할 ‘자격을 갖춘’ 수요처가 없어서다. 하이창원은 두산에너빌리티를 비롯해 창원시 산하기관인 창원산업진흥원, 한국산업단지공단이 공동 출자한 특수목적법인이다.
최근 창원시의회는 하이창원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을 따져 묻기 시작했다. “버는 돈은 없고 대출 원금과 이자만 지급하고 있다”는 지적에 지난주부터 하이창원에 대한 행정사무조사도 시작됐다. 일각선 사업이 접힐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파격적인 규제혁신’을 약속하며 정부가 도입한 규제 샌드박스가 일부 기업들에겐 ‘규제 블랙홀’로 작용하고 있다. 영업난을 겪는 하이창원 본사는 1년 전부터 직원 1명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사업비만 950억원이 투입된 사업을 한 명이 관리하는 셈이다. 해당 직원은 “인수인계를 받지 못해 업무 파악이 힘들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