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조속히 구축해야···생태계 육성에 필수
팹리스 전담할 컨트롤타워 부재···투자금 많아도 비효율적
[시사저널e=고명훈 기자] 국내 팹리스 기업들의 칩 제조 기술이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등 신기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러나 생태계 구축 미비 및 정부 지원 부족으로 한계에 부딪혀 산업 경쟁력이 떨어진단 지적이 나온다. 팹리스 지원 컨트롤타워 등 체계화된 지원 필요성이 제기됐다.
박재홍 보스반도체 대표는 “현재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은 부처 간 파편화돼 있다. 기술력은 있지만 업력이 짧은 신규 스타트업에 상당히 불리한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어 “팹리스 업체들은 국내 IP와 EDA 업계가 취약하다 보니 해외 자원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반도체 하나를 개발하려면 수백억원의 개발비가 든다. 중국은 현지 팹리스 기업이 자국 팹(공장)을 사용하면 정부가 개발비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는데 한국은 지원금 규모가 미세 공정 사용 과제 개발비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모자라다”고 덧붙였다.
◇국내 반도체 팹리스, AI 등 첨단 산업에서 기술력 부각
한국 팹리스 기업들은 AI 반도체를 필두로 글로벌 시장에서 칩 설계 기술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국내 AI 반도체 3사 리벨리온, 사피온, 퓨리오사AI는 서버 및 고성능컴퓨팅(HPC) 영역에서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대신해 AI 추론 분야에 특화된 신경계처리장치(NPU)를 개발하고 올해 양산에 돌입했다.
3사는 최근 공개한 제품이 엔비디아 동급 제품과 비교한 테스트에서 처리 속도와 전력효율 측면 우수한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리벨리온의 경우 올해 글로벌 권위의 반도체 학회인 ‘세계고체회로학회(ISSCC)’에서 국내 AI 반도체 스사트업 최초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들 3사가 현재 인정받고 있는 기업가치는 각각 8000억원, 5000억원, 6800억원 수준이다. 이중 리벨리온과 사피온은 합병을 통해 연내 통합법인을 출범한 이후 차차 상장 수순을 밟을 계획이며, 퓨리오사AI 또한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증시 상장을 준비 중이다.
온디바이스 AI 시장을 공략 중인 딥엑스는 지난 5월 12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가치를 크게 올렸다. 올 초 열린 세계 최대 전자제품박람회 ‘CES 2024’에서 설계 우수성을 인정받아 혁신상을 3개를 받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외에도 대만 컴퓨텍스 타이베이에서 혁신상을 수상하는 등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키우고 있다. 내년엔 거대언어모델(LLM)을 지원하는 온디바이스 AI 전용 칩 시제품도 출시할 예정이다.
AI 부문뿐만 아니라 자율주행, 첨단 운전자 보조시스템(ADAS) 자동차 반도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기업들도 있다.
국내 1위 차량용 반도체 팹리스인 텔레칩스는 글로벌 탑티어 완성차 업체인 포르쉐, 혼다 등 차량에 인포테인먼트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 2022년 설립된 보스반도체는 아직 몸집은 작지만, 캐나다 AI 기업 텐스토렌트와 자동차 반도체 개발 협력 파트너십을 체결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팹리스 생태계 부족···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절실
이처럼 국내 반도체 팹리스가 각 첨단 분야에서 기술력을 키워왔지만, 설계자산(IP), 전자설계자동화(EDA), 디자인하우스, 후공정(OSAT)으로 이어지는 생태계와 장기간 개발을 지속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 체계가 부족하단 지적이다.
팹리스업체 관계자는 “한국은 미국·중국·유럽 등 해외기업들과 비교해 정부 차원에서의 지원이 집중되지 못하다 보니 기초체력을 키우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호소했다.
정부도 시스템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겠다면서 금융지원 등 방안들을 내놓았지만, 반도체 지원책 자체가 한곳에 집중되지 못하고 분산돼 있어 지원이 체계적이지 못하단 지적이다.
정부 지원과 함께 생태계 육성을 앞에서 이끌어줘야 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또한 당장 시장이 급성장 중인 고대역폭메모리(HBM)에 투자를 집중하는 상황이어서 팹리스 생태계 육성에 대한 부분은 계속 미뤄지는 형편이다.
여기에 제3판교 테크노밸리에 구축하기로 한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마저 사업마저 지지부진해하다. 해당 사업의 경우 현재 국토부와 경기도 승인은 마쳤으나, 성남시가 부지 배분을 확정 짓지 못하고 여전히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반도체업계느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가 조성되면 팹리스 중심의 산업단지를 구축해 IP, 디자인하우스, OSAT 등 생태계와 함께 제도적 기반하에 집약적 육성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김경수 한국팹리스산업협회장은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제3판교에 추진 중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가 성남시로 넘어와 현재 확보된 부지가 3만3057~4만9586㎡(1만~1만5000평) 수준인데, 최소 13만2231~16만5289㎡(4만~5만평) 정도의 더 큰 부지를 할당해줘야 한다”며 “팹리스 생태계 기업들과 인력 양성, 연구기관 등이 하나의 지역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클러스터를 만들고자 하는 게 꿈이다. 얘기가 나온 지는 5년이 훌쩍 넘은 것 같은데 아직도 진행되는 부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팹리스 특화된 정부 부서 만들어 지원 집중해야”
정부가 팹리스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특화 조직을 새롭게 조성해야 한단 주장도 나온다. 정부 부처 내 시스템반도체 부문에서 팹리스 산업 전담 부서를 파운드리와 별도로 두고, 독립적인 산업으로 격상해야 한단 의견이다.
팹리스협회는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등 현재 세 개 부처 산하 법인으로 분산돼 있다. 할당된 연구개발(R&D) 투자금액은 많지만, 정작 어느 부처 하나 지원을 집중하기 어려워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단 지적이다.
김 협회장은 “산업부, 과기부, 중기벤처부 등 정부 과제가 많고 지원금도 작은 규모가 아닌데 모두 탑-다운 방식이다. 과제의 아주 상세한 스펙까지 위에서 정하고 여기에 맞는 제안을 기업체에서 하고 있는데 사실 시장 상황은 지속 변하고 있으며 이미 정해진 스펙으로 과제를 수행하면 나중에 쓸모없는 스펙이 돼버리는 경우도 많다”며 “큰 타이틀과 방향성은 정부에서 정하더라도 기업별, 산업별로 차별화된 기술의 스펙은 상향식으로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