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채 증가에도 재정준칙 법제화 지지부진···재정정책 놓고 여야 의견차
“국가부채 심각”vs“쓸 곳 많아” 전문가도 이견···연내 입법 비관적 관측
[시사저널e=최성근 기자] 국가부채가 수년째 급증하고 있지만 재정준칙 법제화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건전성 유지와 유연한 집행 등 재정정책의 우선순위를 놓고 여야간 이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최근 경기침체와 세수감소 영향으로 정부조차 재정준칙을 어긴 내년도 예산안을 내놓은 가운데 예산지출 압력이 높아지는 내년 총선도 다가오고 있어 연내 재정준칙 법제화는 사실상 물건너 갔단 관측이 힘을 얻는다.
12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정부 재정적자가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상반기 관리재정수지는 정부의 올해 목표치(58.2조원)보다도 25조원 많은 83조원 적자를 기록했다. 국가 채무 또한 최근 5년간 100조원 가까이 늘어나면서 올 연말엔 110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 재정 악화는 국가신용등급 하락 등 국가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단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국회에는 나랏빚에 상한선을 두는 재정준칙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지난 2020년 발의된 정부안 외에도 국민의힘 추경호·송언석·윤희숙·류성걸·태영호·박대출 의원안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상정돼 있다.
◇국가부채 급증에 재정준칙 필요성, 국회 논의는 지지부진
현재 재정준칙은 전세계 92개국이 운용하고 있으며 주로 채무준칙(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 한도 제시)과 수지준칙(일정기간 재정수지를 일정 범위에서 관리)을 활용하고 있다. 국회에서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3% 이하로 제한하고 국가채무비율이 60%를 넘으면 적자폭을 2% 이내로 축소해 중장기적으로 60% 안팎에서 국가채무비율을 유지하는 방안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다.
다만, 기재위 내에서 논의에 속도를 내진 못하고 있다. 정부 여당과 야당간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기재위 경제재정소위에 묶여있는 상황이다. 지난달 하순 열린 기재위 전체회의에서도 재정준칙 법제화 관련 법안은 안건으로 올라왔지만 제대로된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기재위 관계자는 “재정준칙은 재정건전화의 실효성을 높이고 정부의 재정건전성에 대한 대내외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급변하는 경제환경에 국가재정이 유연한 대응을 어렵게 할 수도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사안”이라며 “이부분에 있어 여야간 의견접근이 쉽지 않아 합의가 잘 안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재정준칙 법안은 정부 지출을 강하게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재정수입을 늘릴 방안이 없는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여권 관계자는 “재정준칙 법제화의 경우 여야간 의견 접근이 이뤄진 부분도 있는데 야당에서 자꾸 다른 내용을 추가하면서 진척이 안되고 있다”며 “이런식으로 가면 논의에 한이 없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재정지출을 체계적으로 하는 것에 더해 재정수입을 확대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며 “제때 재정이 역할을 하지 못하면 경기침체기 제대로된 대응을 못해 결과적으로 국가채무비율을 더 높일 수도 있다.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 가능성을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5년간 재정적자 500억원, 법제화 시급”vs“확장재정 필요한 시기”
재정준칙 법제화 필요성을 놓고는 경제 전문가들도 의견이 엇갈린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지난 3년간 연평균 재정적자가 100조원이 넘는다. 건전재정하겠다는 올해도 실질적인 재정적자는 93조원에 달하고 내년 적자도 92조원으로 잡았으니 5년간 우리나라 재정적자는 500조원에 달하는 것”이라며 재정준칙 법제화가 시급하다고 봤다.
법안에서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3% 이하로 제한한 것에 대해선 “3%의 적자가 재정의 손발을 묶지 않는다. 재정준칙은 지출을 늘리지 말란 뜻이 아니고 부채를 너무 내지 말라는 것”이라며 “지출을 줄이기 실으면 세입을 늘리면 된다. 3%의 적자로 재정의 역할을 제한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오히려 5%, 6%가 재정의 역할을 더 조일 것”이라며 “이렇게 많이 적자를 내면 얼마안가 재정지출이 신축적으로 늘어나지 못한다. 재정적자를 마구 내도 국민을 위한 것이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건 착각”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김유찬 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은 “지금 시점에 재정준칙 도입은 필요하지 않다. 현재 경제 상황에서 정형화된 수치로 표현된 재정준칙을 지켜나가는 게 어렵다”며 “우리나라는 재정준칙이 없으면서도 국가재정법에 예타, 재정성과 평가 등 국가재정을 굉장히 건실하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연성적 재정준칙이 이미 들어있다”고 말했다.
현재 경제상황이 경기 침체기라 정부 재정 역할이 크게 필요한 시기란 진단이다. 그는 “정부 재정지출을 늘려서 경제를 살려주는 역할을 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전환이란 국가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있어 수십 년에 걸쳐 정부 지출이 크게 필요하다”며 “재생에너지 발전, 자동차, 산업시설 등에 있어 설비투자에 있어 정부가 선제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이 상황에 재정준칙을 걸어놓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국가채무 수준은 크게 높지 않단 진단이다. 김 전 원장은 “(국가채무가) GDP의 50% 정도인데 이중 15~20% 정도는 금융성 채무”라며 “금융성 채무는 일반 채무와 달리 대응하는 금융자산을 갖고 있다. 그래서 금융채무는 사실 빚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데 금융채무를 빼면 일반 적자성 채무는 높지 않다”고 설명했다.
◇ 정부도 재정준칙 어긴 예산안 제출, 연내 입법 비관론 확산
정부는 올연말까지 재정준칙 법제화를 마무리하겠단 계획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최근 발표한 내년도 예산안의 경우 지출 증가폭이 올해 대비 2.8%로 역대 최저 수준으로 묶었지만, 관리재정수지적자는 GDP 대비 3.9% 수준으로 정부가 재정준칙 기준으로 내세운 적자 한도 3.0%를 넘겼다.
세수 감소 영향이라 하지만 정부가 스스로 제시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정부의 재정준칙 추진 의지에 의문이 제기된다.
재정분야 전문가는 “정부 스스로 내놓은 법안이 통과되기도 전에 스스로 어겼으니 사실상 재정준칙을 포기한 것”이라며 “3.9%라는 건 경기 둔화가 와서 세입 결손이 생기면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단 점을 보인 것이기에 재정준칙은 이번 회기에 통과되기 어렵고, 통과된다 하더라도 이런식이면 큰 의미가 없다”고 비판했다.
야권 관계자는 “정부의 무능으로 세입기반이 훼손되니 내년도 예산안에서 그렇게 강도하던 재정준칙 기준도 못지켰다”며 “재정적자 안 만들겠다고 돈을 안쓰는게 반드시 옳은 건 아니다. 곳간이 비더라도 정부는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적 일정 또한 재정준칙 법제화가 쉽지 않은 요인으로 작용한다. 여당은 현재 재정준칙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가 다가오면 각종 지역 현안 공약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재정준칙을 따른다고 재정지출이 큰 내용을 공약에서 뺄 가능성은 희박하다.
기재위 관계자는 “올해 정기국회 내 재정준칙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긴 어려워 보인다. 연내 입법에 성과가 없다면 여야 모두 선거모드로 들어가면서 법안은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