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장비 반입 취소 속출
미국의 중국 반도체 견제도 악재

[시사저널e=이호길 기자] 반도체 소자 기업들이 업황 악화로 허리띠 졸라매기에 나서면서 장비업계가 울상을 짓고 있다. 설비투자 축소로 장비 주문이 취소된 데다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 통제 강화로 중국 수출도 어려워졌다. 장비업계는 올해 말까지 발주 가뭄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비용을 축소하며 버티기에 돌입했다.

6일 장비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부터 반도체 장비 반입 계획이 연기되기 시작하더니 올해 들어서는 납품이 아예 취소되기 시작했다. 반도체 업황이 혹한기에 접어들면서 신규 장비 도입 필요성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지난해 11월부터 장비 주문을 줄줄이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클린룸 생산 현장. /사진=삼성전자

◇재고 급증으로 수익성 악화···“삼성전자도 장비 투자 확대할 이유 없어”

장비 납품이 어려워지면서 재고 비용도 늘었다. 창고에 장비가 쌓여가는데 상반기까지 반도체 시황 반등이 불투명하단 점에서 차후 발주를 기약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반도체 기업들은 반도체 불황 대응을 위해 올해 투자 규모를 크게 줄이는 추세다. SK하이닉스는 올해 설비투자에 10조원 미만을 집행해 규모를 전년 대비 50% 이상 축소하고, 마이크론도 30% 줄일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시설투자 규모를 전년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밝혔지만, 업계는 장비 반입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장비업체 A사 임원은 “반도체 시장이 크게 꺾였고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마저 이미 적자에 빠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장비 투자를 크게 확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며 “올해 장비업계 매출은 전년보다 30% 이상 감소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B사 대표는 “최근 열린 세미콘 행사에만 6만명 이상이 방문해 미팅건수는 많았지만, 실제 체결된 계약은 거의 없었다”며 “반도체 기업 구매 담당 임원들이 장비를 살펴본 뒤 ‘업황이 나아지면 연락하겠다’는 말만 하고 돌아갔다”고 전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하반기부터 업황이 살아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지만, 장비업체가 체감하는 분위기도 다르다. 장비 발주는 입고 시점보다 6개월~1년 선행해 주문량이 많아져야 하지만, 수요 회복이 없단 점에서다.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라인. /사진=SK하이닉스

◇지난해 11월 한국산 장비 중국 수출액, 두 달전보다 50% 급감

대중 수출 통제도 국내 장비업계에는 악재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지난해 10월 미국 기업이 18나노미터(nm) 이하 D램과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나노 이하 시스템 반도체를 생산하는 중국 업체에 장비 수출을 사실상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고, 최근에는 네덜란드와 일본 정부도 이같은 규제에 동참하기로 했다.

국내 반도체업계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지만, 중국 투자가 위축돼 한국 장비 수요도 줄어들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한국산 장비의 중국 수출액은 2억2700만 달러(약 2830억원)로 규제 발표 직전인 9월보다 50% 감소했다.

장비업계 관계자는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공장 가동에 어려움을 겪고 투자 규모 자체가 줄어들 수 있단 점에서 긍정적인 이슈는 아니다”라며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MAT)나 램리서치 등이 수출 통제 이후 규제에 해당하지 않는 장비를 판매하는 데도 당국 눈치를 많이 본다. 국내 업체들도 괜한 불똥이 튀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하반기에 장비 발주가 큰 폭으로 늘어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한다. 수익성 방어를 위해 소모품 최소화 등 비용 절감에 돌입했다”며 “주문량 증가 이전까지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장비업체가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 규모 전망치는 912억 달러(113조9800억원)로 전년 대비 16% 감소할 전망이다. 올해 D램과 낸드 장비 시장은 전년보다 각각 25%, 36% 감소하고 파운드리 장비 시장도 9% 줄어들 것이란 예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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