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출신 박철 전 부사장, 1심서 징역 2년 선고···法 “책임 피하려고 자료 은폐”
감춘 자료가 타인의 형사사건 증거인지, 인멸·은닉 ‘인식’ 있었는지 등 항소심 쟁점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검찰 수사에 대비해 가습기살균제 사건 관련 증거를 은폐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박철 전 SK케미칼 부사장이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한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가습기살균제 실험 보고서 사본 등을 직원에게 숨기도록 지시한 행위가 제조·판매에 관여한 SK케미칼 임직원들(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인멸로 볼 수 있는지 등이 쟁점이 될 전망이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박 전 부사장을 대리하는 법무법인은 지난 5일 1심 재판부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1심인 서울중앙지법 형사15단독 주진암 부장판사는 지난달 30일 증거인멸·은닉과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박 전 부사장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박 전 부사장은 2012년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장을 끝으로 퇴직한 뒤 SK그룹으로 자리를 옮긴 인물이다. 그는 SK케미칼 법무실장, SK에코플랜트 윤리경영총괄, SK가스 법무실장 등을 역임하다 2017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SK케미칼이 지주회사인 SK디스커버리와 사업회사인 SK케미칼로 인적분할한 뒤에도 SK디스커버리 윤리경영담당으로 근무하며 SK케미칼의 법무와 홍보 업무를 총괄했다.
그는 2013~2019년 타인의 형사사건인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에 관여한 SK케미칼 임직원들의 업무상과실치사상 등 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 또는 은닉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가습기살균제 성분에 대한 서울대학교 실험보고서 사본에 대한 증거인멸·은닉 ▲노트북 저장자료에 대한 증거인멸 ▲USB 저장자료에 대한 증거인멸 ▲외장하드 저장자료에 대한 증거인멸 혐의를 모두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해 그에 따른 법적책임 유무를 밝히는 데 치중했어야 함에도 SK케미칼의 법적·도의적 책임을 피하고자 각종 증거자료를 은닉·인멸했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망각한 채 상당히 부적절한 행동을 했으므로 그로 인한 형사책임을 엄중히 부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재판부는 실험보고서 완본에 대한 증거인멸·은닉, 특별법 위반 등 혐의에는 무죄를 선고했다.
박 전 부사장은 모두 혐의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비공개 결정한 실험보고서 내용이 언론에 유출될까 우려해 직원들에게 일부 사본을 보관하도록 지시한 것일 뿐, 검찰의 압수수색에 대비하거나 임직원들의 형사책임을 면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러한 행동을 한 게 아니어서 증거인멸·은닉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일부 혐의와 관련해서는 관련 파일들이 타인의 형사사건의 증거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결국 박 전 부사장이 보관이나 삭제를 지시한 사본이나 파일 등이 증거인멸죄가 정의한 ‘증거’에 해당하는지, 증거인멸에 대한 인식이나 고의를 갖고 이러한 행위를 했는지 등이 쟁점이 될 전망이다.
판례에 따르면 증거인멸죄의 증거는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해 수사기관이나 법원 또는 징계기관이 국가의 형벌권 또는 징계권의 유무를 확인하는 데 관계있다고 인정되는 일체의 자료다. 타인에 대한 유불리를 가리지 않고, 증거가치의 유무 및 정도도 불문한다.
한편 가습기살균제의 안전성을 검증하지 않고 판매·제조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직 임원들은 지난해 1월 1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