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전도사’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 러시아-우크라인 전쟁 후 입장 변경
ESG 채권, 1년 만에 절반 수준으로 줄어···국내 기업은 지배구조 이슈 집중
[시사저널e=유호승 기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회의론이 확산되고 있다. 대내외적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는 가운데 환경과 사회 등을 챙길 여력이 없어서다. 글로벌 시장에서 시작된 이 회의론은 최근 국내 경제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ESG 경영은 2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최고경영자(CEO)이자 ‘ESG 전도사’로 불리던 래리 핑크 회장은 당시 주주들에 전한 연례 서한에서 “화석연료 기업에 투자를 중단하고 ESG를 투자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공언했다.
아울러 환경 및 기후 변화 대응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미국 최대 석유 기업 ‘엑손모빌’의 이사 3명을 교체하는 안건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가 이끄는 ESG 경영 바람은 미국과 유럽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크게 불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발간한 ‘K기업 ESG 백서’를 보면 국내 30대 그룹의 ESG 경영 관련 투자 계획 규모는 153조2000억원에 달한다. 투자 중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는 부분은 글로벌 인수합병이다.
SK의 일본 친환경 소재 기업 TBM 지분 인수와 SK에코플랜트의 대원그린에너지 등 폐기물 처리 기업 4곳 인수, 한화솔루션의 RES 프랑스(태양광·풍력 기업) 인수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세계를 지배했던 ESG 열풍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역풍을 맞고 있다.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은 올해 5월 “과도한 기후변화 대책은 고객사의 재정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ESG 경영에 회의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적으로 에너지난이 어느 때보다 심각해지자 무리한 탄소중립 정책이 기업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다며 ESG 경영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ESG는 사기’라고 일갈한 바 있다. 그는 테슬라가 S&P500 ESG 지수에서 테슬라가 제외되자 이같이 비판했다. S&P는 테슬라가 충분하지 않은 저탄소 전략과 열악한 근로환경, 인종차별 등이 나타나 ESG지수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
세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거대 경제인이 ESG 회의론을 내놓자 금융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국내외 기업이 앞다퉈 ESG 경영을 내세우며 관련 펀드와 채권으로 급성장했지만, 고물가와 고금리, 고환율 등의 삼중고에 기업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해지며,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ESG에 대한 관심과 투자규모가 줄기 시작한 것이다.
정혜진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높은 물가 상승세를 잡기 위한 각국의 긴축 통화정책과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경기침체에 ESG와 같은 비재무적 가치에 대한 관심과 매력이 희석될 수밖에 없다”며 “7월 국내 ESG 채권은 4조원 발행되며 지난해 7월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금융시장 전반이 약세를 겪는 상황에 ESG에 대한 관심은 더욱 크게 꺾였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ESG 열풍이 빠르게 꺾이며 국내 기업들은 환경과 사회 대신 지배구조 개선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환경과 사회를 챙긴다고 실적 및 주가가 회복되는 상황은 이미 지났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국내 기업의 대표 특수성인 지배구조 이슈에만 역량을 모으겠다는 얘기다.
한 재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이 ESG 경영에 집중하던 이유는 세계적인 흐름에 따라 해외 바이어와 계약하거나 네트워크를 쌓을 때 필요했던 요소였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세계 경제가 흔들리며 ESG 회의론이 대두된 만큼 지배구조 개선 등 예전부터 진행한 프로젝트만 챙기는 쪽으로 방향성을 잡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