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일본, 범국가적 사업으로 자살률 개선에 성공
현장 인력 부족 문제 ‘심각’···민간단체 활동 지원 중요
[시사저널e=이기욱 기자]자살예방을 위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여전히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하루 평균 3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기준 인구로 치환한 10만명당 자살률은 24.6명으로 OECD 평균(11.3명)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꾸준히 감소세를 보이고 있던 자살률이 2018년부터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고 있어 자살예방 정책 개선의 필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자살률 30.2명’ 핀란드, 심리 부검 통해 자살 원인 분석···일본, 법제정 후 국가적 지원
앞서 우리나라와 유사한 자살 문제를 겪었던 일부 선진국들은 다양한 자살 예방 정책들을 통해 자살률을 낮추는 성과를 거둔 바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과거 우리나라보다 높은 자살률을 기록했던 핀란드가 있다.
핀란드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화된 1965년부터 1990년까지 자살률이 3배나 폭증했다. 그 결과 1990년에는 인구 10만명당 30.2명이라는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핀란드 정부는 1986년 세계 최초로 국가가 주도하는 ‘자살예방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교육과 조사연구, 발표활동 등을 강화했다.
우선 자살에 대한 대규모 연구를 위한 기금을 제공함으로써 표적 집단과 주요 문제를 확인하였고 1991년 국가 자살전략을 공식화했다. 이어 1992년에는 실천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5년간의 프로그램 수행에 대해 1998년에 평가를 실시하기도 했다.
핀란드 정부의 핵심 대책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1986년부터 1992년까지 6년 동안 진행된 ‘심리 부검’이다. 심리 부검은 자살이 발생했을 때 사망자의 의료기록과 경찰기록, 주변인 인터뷰 등을 통해 구체적 자살 동기와 자살 방법, 심리적·사회적 영향 등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핀란드의 심리 부검에는 학교와 병원, 사회복지기관, 군대, 교회 등에서 전문가 5만명이 참여했고 부검 결과 무려 3분의 2이상의 자살자가 우울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반면 병원 기록에 의하면 이들 중 단 15%만이 우울증 치료를 받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핀란드 정부는 보건소나 병원들이 정신과 환자 외 일반 외래 환자들의 우울증, 자살 충동 여부까지 주기적으로 체크하도록 했다.
핀란드 정부는 심리 부검 자료를 바탕으로 1992년 자살예방프로그램을 마련한 후 1996년까지 4년간 전국적으로 프로그램을 실시하기도 했다. 또한 병원이나 보건소 등 직접적인 의료, 건강 서비스 제공 부분과 학교, 직장 등 일반적 사회 시설 부분의 연계도 확대해 한 개인이 자살 관련 문제로 건강 서비스에 접촉할 경우 사회적 서비스에도 연결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결과 30.2명이던 자살률은 10년만에 22.1명으로 줄어들었으며 20년이 지난 2010년에는 17.3명이 됐다.
주변국인 일본 역시 적극적인 투자로 자살률을 줄이는데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지난 2003년 27명에 달했던 일본의 10만명당 자살률은 2015년 18.9명을 기록했다. 12년 동안 30%나 감소한 것이다. 지난 2017년 기준 일본의 자살률은 14.9명으로 여전히 OECD 평균보다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지만 2010년 이후 꾸준히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의 자살예방 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정부 주도의 법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돼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다는 점이다. 지난 2006년 일본 정부는 치솟는 자살률을 잡기 위해 ‘자살대책기본법’을 마련했으며 해당 법을 근거로 예산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법제정 이전의 대응정책들은 주로 우울증에 대한 치료와 예방을 중심으로 한 정신의학적 접근에 집중됐으나 제정 이후부터는 개인의 정신건강문제뿐만 아니라 실업, 도산, 다중채무 등 사회적인 요인까지 고려해 종합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특히 법 제정 후 처음 5년간 연간 약 30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는 점은 우리나라의 자살예방 정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2015년 일본의 자살 예방 예산은 7837억원으로 전년(3614억원) 대비 두 배 이상 늘어나기도 했다. 일본의 현재 자살 예방 관련 예산은 8000억원에 달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해 전국 229개 기초단체 전체 예산 229조원 중 자살 예방과 관련한 부분은 0.016%인 336억원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정부 예산 218억원을 합쳐도 총 584억원에 불과하다.
이외에도 호주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용성, 접근성 강화, 지역사회 자원 활용을 강조한 자살예방 대책 수립해 1990년 13.4명이었던 자살률을 2013년 11.2명까지 낮췄다. 호주의 국가자살예방전략은 ▲1차적 보건 네트워크에 기반한 지역적 접근 ▲전 국민 위기지원서비스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원주민의 자살예방 전략 포함 ▲자살 및 자해시도자의 사후관리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부족한 예산·인력, 예방 활동 방향에도 영향···“민간단체에 맡겨야”
우리나라 정부 역시 지난 2018년 ‘자살예방 국가행동 계획’을 수립하며 전 부처적, 범 사회적 정책 추진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현장 관계자 및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아직 규모나 방향성 측면에서 미흡하다는 지적이 다수 제기되고 있다.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예산과 인력의 부족이다. 한 자살예방 업무 담당 공무원 A씨는 “자살 위험군 관리 업무는 단기간에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며 “한 명의 보호 대상이 발굴되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문제는 위험군, 보호 대상은 계속해서 발굴된다는 점”이라며 “기존 대상자에게 ‘다른 분이 발굴됐기 때문에 이제는 연락을 못드리겠다’고 하는 것 말이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정해진 인력에 업무가 늘어날 수밖에 없고 온전한 업무 수행이 힘들어진다”고 덧붙였다.
인력 부족 문제는 자살 예방 정책의 방향성 문제로도 이어진다. A씨는 “자살예방 사업은 현재 복지보다는 정신 건강 분야로의 접근이 대부분”이라며 “전문가들이 실제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를 케어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위험이 높은 분들이 그 단계에 접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자 발굴을 위한 폭넓은 조사가 필요한데 사실 그럴 여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주희 생명존중교육협의회 대표 역시 “사회복지와 관련해서는 좀 더 보편적인 예방활동이 이뤄져야 한다”며 “현재 정부 정책은 정신의학적 측면에서만 관리를 하고 있고 민간이 보편적 예방활동을 대부분 맡아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뛰어난 민간 단체들의 활동을 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성열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국가에서 자살예방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우리나라와 경제 규모가 비슷한 영국의 경우 우리보다 자살률이 훨씬 낮음에도 불구하고 자살 예방을 담당하는 장관이 따로 있다”며 “하지만 우리나라는 정부 부처 과장 정도의 공무원이 해당 업무를 담당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국가적 사업으로 이끌어갈 전담 기관이 있어야 정책이 지속 가능하다”며 “특정 공무원이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 인사 이동 주기마다 변동이 생길 수밖에 없어 전문성도 떨어지고 주체적으로 정책을 이끌어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또한 그는 “차라리 한 평생 관련 업무에 몸바쳐 일하고 있는 민간 전문가, 단체에게 일을 맡기고 정부는 지원을 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며 “정부가 위에서 통제, 감독하는 현재의 방식에서도 벗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393, 생명의 전화 1588 9191, 청소년 전화 1388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