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101년과 독립운동가] 해방 후 남북통일정부 수립 힘쓴 조완구
  • 이준영 기자(lovehope@sisajournal-e.com)
  • 승인 2020.05.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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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만들고 끝까지 지켜
“통일 못보고 가는 게 한이다”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이미지=국가보훈처
이미지=국가보훈처

조완구(趙琬九) 선생은 상해에서 대한민국 국회인 임시의정원을 만들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선생은 임시정부가 혼란을 맞자 한국독립당을 결성해 임시정부의 조직을 재정비했다.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와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조완구 선생은 1881년 3월 20일(음력) 서울 계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899년 내부 참봉을 지냈다. 1902년 내부 주사(主事)에 임명됐다. 그러나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요하며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자 25세의 나이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선생은 일제가 국가 주권을 침탈하자 곧바로 관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대종교를 찾았다. 대종교는 을사5적 암살을 도모하던 나철(羅喆)이 세웠다. 당시 대종교는 단군을 섬기는 민족종교로서 일제 침략에 대항하는 상징적 존재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선생은 대종교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선생은 1914년 북간도로 홀로 향했다. 당시 북간도 지역에는 중광단, 정의단, 북로군정서 등 대종교 계열이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선생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대한국민의회에도 참여했다. 대한국민의회는 노령지역의 독립운동자들이 기존의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선생은 이동녕, 조성환 등과 함께 상설의회 의원으로 선임돼 활동했다.

◇ 임시의정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나서다

1917년 7월 상해에서 활동하던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움직임이 구체화됐다. 이를 주도한 것은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이었다.

조완구 선생은 신한청년당이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할 때부터 이 문제에 관여했다. 1919년 2월 신한청년당의 여운형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왔다. 이때 선생은 이동녕과 함께 “중앙기관은 국제도시인 상해에 둬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온 겨레가 힘을 합해 조선이 ‘독립국’임을 전 세계에 선포한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발생했다. 선생은 이동녕, 조성환, 김동삼, 조소앙 등과 함께 상해로 갔다. 3월말 상해에는 국내외 각지에서 1000여명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4월 10일 상해에 모인 인사들 가운데 29명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였다. 조완구 선생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들은 국회의 역할을 하는 임시의정원을 결성했다.

곧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다. 정부 조직으로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고 내무·외무 등 6개 행정부서로 관제를 정했다, 헌법으로 임시헌장에 대한 심의에 들어갔다. 이로써 1919년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선생은 국무원 위원으로서 5월 12일 임시의정원 회의에 출석해 임시정부가 추진해나갈 외교, 재정, 교통 등의 활동 방향을 밝혔다. 임시사료편찬회 구성, 임정과 국내동포 연계를 위해 교통부 산하에 교통국을 설치하고 내무부 주관에 연통제 실시, 독립신문 발행 등이 그것이다.

◇ 혼란에 빠진 임시정부 수습

임시정부는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채택했지만, 이상룡, 양기탁, 안창호 등 선임된 국무령이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거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김구가 국무령을 맡았지만 임시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임시정부는 이를 수습하고 타개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해 국무위원제를 채택하고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했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대단결을 해 유일한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자는 것이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은 상해에서 일어나 북경, 만주, 국내까지 확대됐다.

선생은 상해에서 유일당운동에 힘썼다. 선생은 상해에서 김구, 김철, 송병조, 윤기섭 등과 상해촉성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북경, 광동, 무한, 남경 등에서 조직된 촉성회와 연합해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를 결성했다. 1929년 좌익계열과 통일도 추진했다. 그러나 유일당의 조직방법론에 대한 이견으로 좌익계열이 탈퇴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인사들과 함께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한국독립당은 전민족이 대단결한 유일당은 아니었지만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안창호, 김구, 송병조, 차리석, 조소앙 등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결성한 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기초세력으로 역할했다. 정부 조직을 재정비한 임시정부는 특무공작으로 정부의 활동을 활성화시키고자 했다. 이에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결행했다. 이는 임시정부가 되살아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1935년 7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의열단 등이 통일을 이뤄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면서 임시정부는 무정부와 같은 상태가 됐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민족혁명당은 유일당운동에 이은 통일전선운동의 결과로 결성된 것으로 단일신당이 결성되면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방향에서 추진됐다.

조완구 선생은 임시정부의 해체를 전제로 하는 단일신당운동에 대해 반대했다. 국무위원 송병조, 차리석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켰다. 1935년 11월 송병조, 차리석, 김구 등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은 세력들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결성했다.

이들은 한국국민당을 결성한 후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를 수습했다. 민족혁명당에 참여해 결원이 된 국무위원을 보선했다. 이에 임시정부의 조직도 다시 갖춰졌다. 김구 외무, 송병조 재무, 조성환 군무, 이시영 법무, 차리석 비서장 , 조완구 선생은 내무장을 맡았다. 이후 임시정부는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 임정의 국군 ‘한국광복군’ 창설···좌우연합정부 구성

조완구 선생은 1940년 임시정부와 함께 중경으로 옮겨갔다. 상해를 떠나 중경에 이르기까지 8년여 동안 임시정부는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선생은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았다.

선생은 중경에 정착하면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의 조직을 확대 개편했다.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독립운동 세력은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재건), 조선혁명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3당의 합당이 추진됐다. 선생은 한국국민당의 대표로 3당 통일회의에 참가해 3당의 합당을 추진했다. 3당은 1940년 5월 완전히 통합해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이에 민족주의 세력들이 모두 임시정부로 결집했다.

이들은 이어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창설된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이었다. 임시정부의 조직 재정비로 주석에는 김구가 선임됐다. 선생은 내무부장에 선임됐다. 선생은 교민들의 생활을 살피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중경 시기 임시정부는 기반이 확대됐다. 중경에 거주하고 있는 교민이 600여명에 달했다. 임시정부의 위상도 올라갔다. 좌익진영의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로 통일을 이뤘다. 임시정부와 관계없이 독자 세력을 형성하며 활동하던 좌익진영의 세력들이 임시정부로 합류해 왔다.

1942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 진영의 정당 및 단체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했다. 좌익진영의 무장세력인 조선의용대도 한국광복군에 편입했다. 좌우익진영의 독립운동 세력이 모두 임시정부 산하로 결집했다. 이에 임시정부도 좌우연합정부로 구성됐다.

1944년 4월 개헌을 통해 좌익진영이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좌익진영의 인사들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과 행정부서 책임자로 선임했다. 좌우연합정부는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 등 국무위원 11명으로 구성됐다. 선생은 좌우연합정부에서 재무부장을 맡았다.

◇ “통일을 못보고 가는 게 한이다”

1945년 8월 10일 선생은 중경에서 일제의 패망소식을 들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귀국해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임시정부를 과도정권에 인계한다는 방침이 결정됐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야당 측에서 ‘임시정부 개조’와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요구했다.

이에 조완구 선생은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나 27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잘나서 그런 것보다 못나서 그렇습니다. 누가 잘난 사람이 그것을 지키고 있겠소, 나 조선 가서 27년 했으니 한자리 달라 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 마시라입니다.”

주석 김구가 중경으로 돌아온 후 국무회의에서 향후 방침을 결정했다. 임시정부는 현 상태로 환국하며, 국내에 들어가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과도정권에 임시정부의 모든 것을 인계한다는 내용이었다.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국내로 돌아왔다. 그러나 미국 측에서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아 정부 명의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게 됐다. 선생은 환국 후 국내의 임시정부 청사 경교장으로 갔다. 12월 3일 국무위원들이 경교장에 모여 국무회의를 개최했다. 개인자격으로 들어왔지만 임시정부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조국은 소련과 미국에 의해 사실상 분단돼 있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됐지만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다.

선생은 이 같이 밝혔다. “지금 나라 꼴이 이 지경으로 두동강이 났고 제각기 제 목소리만 높이며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니 우리가 나라를 찾겠다고 발버둥치며 완전한 통일독립을 바라던 것이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우리가 모진 괴로움을 참으며 수십 년을 싸운 것은 나라 없는 백성이 될 수 없어서 발버둥친 것이지 우리나라를 여우의 손에서 뺏어서 이리나 늑대에게 나누어 주려고 애쓴 것은 아니지 않는가.”

선생은 환국한 후 임시정부를 지키고자 했다. 임시정부 방침대로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과도정권에 임시정부의 모든 것을 인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 활동을 막았다. 국내의 상황도 좌우로 분열되고, 임시정부 요인들도 입장을 달리했다.

선생은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를 지켰다.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남북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평양으로 가 남북협상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족과 국토는 분단됐다.

임시정부를 지키고 민족의 통일과 자주독립을 주장한 이들을 죄인시하는 세력이 생겼다. 이들에게 김구가 해방된 조국에서 흉탄을 맞고 서거했다.

조완구 선생은 6. 25전쟁 중 조소앙 등과 함께 납북됐다. 1954년 10월 27일 “통일을 못보고 가는 게 한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해방 후 입국하는 임시정부 요인들 / 이미지=국가보훈처
해방 후 입국하는 임시정부 요인들 / 이미지=국가보훈처

 

이준영 기자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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