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e=한승현 로완 대표이사 ] 인류의 역사는 곧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눈높이'를 높여온 축적의 역사다. 우리는 늘 한계를 느끼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한때 불가능했던 일은 새로운 기준이 되고, 그 기준 위에서 또 다른 혁신이 시작된다. 의학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19세기 말까지 의사는 오직 맨눈과 촉감에 의존해 환자의 몸속을 상상했다. 뼈가 부러져도 피부를 찢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1895년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은 음극선 실험 중 우연히 투명한 종이를 뚫고 지나가는 미지의 광선을 발견했다. 그는 이 광선에 'X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아내의 손에 X선을 쪼여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찍어냈다. 이 발견은 눈에 보이지 않던 인체 내부를 시각화하는 경이로운 경험을 선사했고, 그렇게 인류의 눈높이는 한 차원 높아졌다. 뢴트겐의 X선 발견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었다. 이는 CT(컴퓨터 단층촬영), MRI(자기공명영상) 등 오늘날 다양한 의료 영상 기술 발전에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10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다시 한번 새로운 기술 앞에서 의료의 눈높이를 재정의하고 있다. 바로 인공지능(AI)이다. AI는 단순한 데이터 분석을 넘어, 인간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초월적인 감각'을 의료 현장에 선사한다. 마치 투시 능력을 가진 새로운 눈과 같다. AI는 MRI나 CT 같은 수백 장의 영상 데이터를 분석해 인간의 눈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1mm 크기의 미세 암 병변을 찾아낸다. 이러한 능력은 이미 현실의 의료 현장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구글의 AI는 당뇨병성 망막증 진단에서 안과 의사의 진단 정확도를 뛰어넘는 성과를 보였고, 유방암 진단 AI는 영상의학과 의사의 판독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주고 있다. 이 능력은 마치 X-레이가 뼈를 보이게 만들었듯, AI가 우리 몸속의 보이지 않는 위험까지 투명하게 비춰주는 것이다.
기존 의료 시스템은 의사 수를 늘리고 병원을 더 짓는 산술급부적인 성장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이는 시간, 비용, 인력이라는 명백한 한계를 가진다. 반면, AI가 가져오는 변화는 기하급수적이다. AI는 한 명의 의사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넘어, 전 세계 모든 의사에게 동시에 적용될 수 있다. 마치 체스판에 쌀알을 놓는 우화처럼, 첫 칸에 쌀 한 톨을 놓는 산술급수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마지막 칸의 쌀알을 상상할 수 없듯이, AI는 단 한 번의 혁신으로 전 세계 수백만 명의 환자에게 즉각적인 혜택을 제공한다. 이는 질병의 조기 발견, 신약 개발, 치료 효율성 등 모든 영역에서 의료 서비스의 양과 질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기하급수적 변화가 현실 의료에 적용되기까지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의료는 무엇보다 환자의 안전이 최우선이므로, 모든 기술은 엄격한 임상시험과 규제 당국의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AI는 바로 이 '임상적 증거'를 쌓는 과정 자체를 획기적으로 가속화하는 역할을 한다. 방대한 환자 데이터를 분석해 임상시험에 적합한 환자를 빠르게 찾아내고, 신약 후보 물질 탐색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며, 수많은 임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안전성과 효능을 입증하는 과정을 돕는다.
나아가 AI는 전 세계의 모든 의학 문헌을 통째로 기억하는 천재적인 탐정이자, 환자 데이터를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다. 한 명의 의사는 아무리 뛰어나도 모든 논문, 모든 임상 사례를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AI는 방대한 의학 데이터를 단 몇 초 만에 학습하여 숨겨진 희귀 질병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또한, 진료실 밖에서 웨어러블 기기를 통해 환자의 수면 패턴, 활동량, 심박수 같은 실시간 데이터를 분석해 미세한 이상 징후를 조기에 발견하고, 만성질환의 악화를 미리 경고하는 등 지속적인 환자 관리의 영역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인공지능은 의료 행위의 주체인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의사들이 오직 오감에 의존해야 했던 과거의 한계를 뛰어넘어, 질병의 원인을 더 정확히 이해하고 최적의 치료를 제공할 수 있도록 돕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이제 의학은 인간의 따뜻한 공감과 AI의 초월적인 감각이 결합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한승현 로완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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