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잠 건조 승인·농축·재처리 지지 문서화···“오랜 숙원 출발점”
건조 장소 놓고 막판 줄다리기···발표 1~2분 전까지 문구 조정
조선·방산 고급기술 협력 본격화···반도체·배터리 협력도 확대
[시사저널e=길해성 기자] 한미 양국이 핵추진잠수함(핵잠) 도입과 우라늄 농축·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문제에 대한 협력 의지를 공식 문서에 담았다. 미국이 해당 분야를 문서화해 지지한 건 처음이다. 핵잠은 고급 기술이 필요한 전략 자산이고, 농축·재처리는 원전 연료를 직접 다루는 민감 분야다. 양국이 이 문제를 문서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안보·산업 구조 모두에 변화를 예고한다.
◇ 핵잠 승인·농축·재처리···“금기였던 영역에 공식 문구 등장”
백악관이 14일(현지시간) 공개한 공동 팩트시트에는 ‘미국은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연료 조달 등 조선 사업 요건 충족을 위해 협력한다’고 적혀 있다. 핵잠 건조는 단순한 무기 구매가 아니라 국내 조선소에서 직접 설계·건조해야 하는 고난도 사업이다. 미국이 해당 부분을 명시적으로 승인한 것은 외교적으로 이례적이다.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문제도 큰 변화다. 현재 한국은 미국과의 원자력 협정(123협정)에 따라 연료를 20% 이하 농도에서 연구용으로만 제한적으로 다룰 수 있다. 재처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번 문구에는 ‘한국의 민간 우라늄 농축과 평화적 목적의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로 이어지는 절차를 지지한다’는 표현이 들어갔다. 이는 ‘즉시 허용’은 아니지만 양국이 협정 개정 또는 절차 논의에 나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대통령실도 이를 “오랜 숙원 과제의 출발점”으로 해석한다. 핵잠 도입과 원자력 협정 개정 방향에 대한 미국의 포괄적 동의를 확보했고. 이제 구체적인 이행 협상 단계로 넘어가는 토대를 놨다는 평가다.
◇ 핵잠 건조 장소가 최종 쟁점···발표 직전까지 줄다리기
이번 협상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은 핵잠 건조 장소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SNS에서 “한국은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핵잠을 건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해 한화오션이 인수한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전면에 내세운 발언이었다.
한국 정부는 핵잠은 한국에서 건조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정상 간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건조를 전제로 진행됐다”고 밝혔다. 결국 이번 문서는 건조 장소를 명확히 적지 않는 방식으로 갈등을 정리했다. 발표 1~2분 전까지 문구를 조정할 정도로 치열한 조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 미국 “한국 기술·기업이 미국 제조업 핵심”···부품·조선·첨단기술까지 확대
미국은 이번 팩트시트에서 반도체·조선·배터리·AI·양자기술 등 주요 산업에서 한국과의 협력을 대폭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 내 기술 인력 부족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공정·설계·정밀 제조 역량이 미국 제조업 재건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공식 인정한 것이다.
크리스토퍼 랜도 미 국무부 부장관이 “한국은 미국 제조업 부흥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파트너”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한국 기술자 파견을 위한 새로운 비자 제도를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9월 조지아 현대차·LG 배터리공장에서 한국 엔지니어들이 이민 단속에 체포됐던 사건 이후 기술자 파견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지적이 커진 데 따른 조치다.
비자 제도 정비는 반도체·배터리·조선 분야에서 한국 기업의 리스크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 미국 현지 공장의 초기 공정 안정화와 장비 세팅은 한국 엔지니어 의존도가 매우 높은 영역으로 인력 투입이 원활해지면 공장 가동·수율 확보 속도도 빨라질 전망이다.
◇ 조선·방산·원전·반도체···핵심 산업 전반에 구조적 변화 예상
핵잠 건조 승인과 원자력 협력 확대는 먼저 조선업에 직접적인 변화를 예고한다. 핵잠은 잠수함·군함 제작 기술, 방산 시스템, 원자로 기술이 결합된 고난도 사업으로 국내 대형 조선소와 협력업체 수백 곳이 참여해야 한다. 건조가 국내에서 이뤄질 경우 경남·울산 등 조선 벨트의 생산·고용이 늘어나고, 미 해군·상선 일부를 한국 조선소에서 건조할 수 있는 여지도 생겨 수주 기회 확대가 기대된다.
방산 분야에서도 파급효과가 뒤따른다. 핵잠 추진체, 소음 저감 기술, 전투체계 등은 모두 고급 방산 기술에 해당한다. 이 분야 협력이 본격화되면 한국 해군 전력과 국내 방산 기업의 기술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지게 된다. 그동안 한미 방산 협력이 전차·포병 등 재래식 성격이 강했다면 앞으로는 잠수함·함정 같은 전략자산 중심으로 협력 축이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원전 산업은 농축·재처리 권한 논의가 가장 직접적인 변수다. 한국이 원전 연료 단계 일부를 자체적으로 관리할 여지가 생기면 장기적으로는 원전 수출 경쟁력을 강화하는 기반이 된다. 다만 농축·재처리는 국제 규제와 비용 부담이 크기 때문에 수년 이상 논의가 이어질 전망이다. 미국 내부 우려와 중국의 반응을 관리해야 한다는 점도 부담으로 남는다.
반도체·배터리 분야는 투자·인력 문제 개선이 핵심이다. 미국이 대미 투자 상한을 설정하고 외환시장 협력을 명문화하면서 한국 기업의 추가 투자 계획이 예측 가능해졌다. 기술자 비자 제도 개편이 추진되면 미국 현지 공장의 초기 가동과 수율 확보 과정에서 겪던 인력 공백 문제도 줄어들 전망이다. 이는 삼성·SK·LG 등 주요 기업의 생산 안정성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합의를 한미 동맹이 전략 기술·원자력·조선·방산·반도체까지 확장하는 분기점으로 본다. 업계 관계자는 “핵잠·농축·재처리 등 그동안 논의가 어려웠던 분야에서 방향성이 문서로 확인된 만큼 산업 전반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며 “다만 실제 사업 착수까지는 국제 규제와 예산, 외교 변수 등이 남아 있어 속도는 제한적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어 “한미가 합의한 문서의 범위가 현실의 성과로 이어지느냐가 앞으로의 핵심 과제”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