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G 운반선 주춤하자 VLCC 중심 유조선 발주 급증
노후선 교체·운항거리 확대 맞물리며 수요 구조적 증가
운임 10만달러 시대···선주사들 ‘새 배’ 발주로 선회
해외 조선소 활용해 가격경쟁력 확보 나선 K조선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 발주가 주춤한 사이 글로벌 원유 수출 항로의 장거리화와 선대 노후화가 맞물리며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을 중심으로 유조선 발주 수요가 되살아나고 있다. 올 하반기 들어 국내 조선소들의 유조선 수주량은 이미 지난해를 뛰어넘었고, 해외 조선소를 활용한 가격 경쟁력 확보 전략도 본격화하고 있다.
12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국내 조선 3사(HD한국조선해양, 한화오션, 삼성중공업)는 최근 잇달아 유조선 수주를 따내며 곳간을 채우고 있다. 한화오션은 전날 미국 선주와 2척의 VLCC 계약을 따낸 것으로 전해진다. 척당 가격은 약 1800억원에 이른다. 삼성중공업도 앞서 7일 유조선 2척을 2901억 원에 수주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24일에도 라이베리아 선주로부터 3411억 원 상당의 유조선 3척에 대한 건조 계약을 따냈다.
국내 조선업계는 올해 누적 기준 46척의 탱커를 수주했다. 지난해 전체 수주량인 26척을 일찌감치 넘어선 수치다. 효자 선종인 LNG 운반선 수주가 주춤한 사이 VLCC를 중심으로 한 탱커선 발주가 살아나면서 조선소의 먹거리가 끊이지 않는 모습이다.
◇ 노후선 교체·항로 장거리화가 수요 키워
유조선은 노후선 비중이 높은 대표적 선종이다. 전 세계 유조선 선대 중 선령 15년 이상 노후선 비중은 43%에 달한다. 국내 조선소의 주력 선종인 VLCC의 경우에도 약 40%가 노후선으로 분류된다. 향후 교체 대상만 250척에 이른다. 국제해사기구(IMO)의 탄소규제 강화로 노후선 교체 압력이 커지면서 발주는 가속화할 전망이다. 수에즈막스급·아프라막스급까지 포함하면 교체 수요는 770척 이상으로 추산된다. 업계 관계자는 “노후선을 교체하기 위한 발주잔량도 매우 낮은 상태라 향후 유조선 발주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운항 수요 역시 탄탄하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등 오펙플러스(OPEC+) 주요 산유국이 감산을 점진적으로 완화하면서 중동발 원유 수출이 늘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 제재와 미·중동 간 항로 장거리화로 수송 거리가 길어지면서 탱커 투입이 확대되고 있다.
이에 탱커 운임도 연중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VLCC 운임은 하루 10만달러 안팎까지 치솟으며 지난해 평균의 두 배를 넘어섰다. 중동-중국 노선 기준 일일 운임은 한때 12만5000달러에 달했고, 수에즈막스급과 아프라막스급도 각각 7만~6만달러대 수준까지 상승했다. 영국 해운 정보업체 로이즈리스트는 “선박 가용 물량이 줄고 장거리 항로가 늘어나면서 탱커 운임이 구조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운임 급등이 이어지자 선주사들이 운항 수익을 선점하기 위한 신규 발주에 나서고 있다는 설명이다.
탱커 운임은 연중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VLCC의 9월 기준 평균 정기용선료는 하루 9만4000달러로, 6월 초(2만5000달러) 대비 270% 이상 급등했다. 중동 지역의 원유 수출 증가와 장거리 항로 확대가 맞물리면서 수요가 늘어난 결과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는 “OPEC+의 감산 완화로 원유 수출이 확대되며 VLCC와 수에즈막스급 운임이 각각 8%, 10% 가까이 올랐다”고 분석했다.
◇ 해외조선소서 건조···인건비 절감해 수익성 확보
LNG운반선과 컨테이너선 시황이 둔화된 상황에서 유조선 수주는 안정적인 도크 가동률을 유지할 수 있는 일감으로 평가된다. 다만 수익성은 여전히 부담이다. VLCC의 신조선가는 약 1억2600만달러로, LNG운반선(2억4800만달러)의 절반 수준이다.
국내 조선소는 기술력과 생산 네트워크를 병행해 가격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전략을 추진 중이다. 인건비를 낮춰 수익성을 확보하겠단 전략이다. 설계 및 장비 조달은 국내 조선소에서 하고 전선(全船) 건조는 해외조선소와 분담하는 방식이다. 삼성중공업은 최근 라이베리아 선주로부터 수주한 유조선 3척을 베트남 조선소에서 건조하기로 했다. HD한국조선해양 역시 일부 물량을 해외 조선소로 분산해 중국 저가 조선소와의 경쟁에 대응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내년에도 유조선 시장의 호조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 변용진 iM증권 연구원은 “유조선 운임 상승으로 선주가 돈을 벌면 곧 신규 선박의 발주 증가로 이어질 전망”이라며 “유조선은 더 이상 한국 조선사의 최우선 선종은 아니지만 모든 슬롯을 LNG운반선으로만 채울 수 없어 적정한 일감을 확보하기 위해 필수적인 선종”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