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데이터센터 확산에 전력 수요 폭증
북미 ESS 시장, 국내 배터리 3사에 새 기회로
[시사저널e=송준영 기자] 전기차 ‘케즘(Chasm·일시적 수요 둔화 구간)’으로 활력을 잃었던 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ESS(에너지저장장치)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다. AI(인공지능) 산업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ESS 시장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주요 배터리 업체들은 이미 이러한 흐름을 감지하고 전기차 배터리 생산라인 일부를 ESS 전용으로 전환하는 등 시장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이다.
◇ AI 성장에 주목받는 ESS 시장···국내 기업엔 기회
ESS는 생산된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공급하는 시스템이다. 대용량 배터리를 통해 남는 전력을 저장하고,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시간대에 다시 공급함으로써 전력망의 안정성을 높인다. 태양광·풍력처럼 발전량의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 산업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하며,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다.
ESS가 다시금 배터리 업계 안팎의 주목을 받는 배경에는 AI 산업의 급성장이 자리하고 있다. AI 확산으로 대규모 연산을 처리하는 데이터센터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전력 소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인 만큼, 전력 피크 시간대나 정전 상황에서도 전력망을 안정적으로 보조할 수 있는 ESS 수요도 덩달아 커진 것이다.
특히 북미 ESS 시장은 신재생에너지 보급 확대와 AI 데이터센터 수요 확대에 따른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지역으로, 배터리 업계의 새로운 공략지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태양광산업협회에 따르면 미국 내 ESS 설치 규모가 지난해 연간 36.3GWh(기가와트시)에서 2030년 100GWh 이상으로 3배가량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1GWh는 1000억원 이상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급 규모다.
전기차 케즘으로 부진에 빠진 국내 배터리 기업에는 ESS가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국내 주요 배터리 셀 3개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 ON)는 전기차 수요 감소로 인해 전기차용 배터리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2022년만 하더라도 1조원이 넘어서는 영업이익을 냈지만 지난해에는 9000억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게다가 미국이 중국을 배제하는 공급망 재편 전략을 한층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도 미국 ESS 시장은 국내 배터리 업계에 매력적인 기회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은 내년부터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OBBBA)’에 따라 금지외국기관(PFE) 규제와 최대 50%에 달하는 고율 관세를 시행하며 중국산 배터리 및 부품을 단계적으로 배제할 계획이다. 현재 북미 ESS 시장의 약 85%를 중국 기업이 점유하고 있는 만큼, 이 규제가 본격화될 경우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시장 공백을 메울 유력한 대체 공급처로 부상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 적극적인 공략에 나선 국내 배터리 업체들···성과 기대도 높아져
이 같은 상황에서 국내 배터리 3사들은 이미 미국 ESS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는 모습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2월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 공장을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생산 기반을 갖춘 ESS 전용 기지로 전환했다. 최근에는 스텔란티스와 합작한 캐나다 공장 내 일부 자동차 전지 라인을 ESS용으로 바꾸고, 연내 LFP 배터리 양산에 돌입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LG에너지솔루션의 ESS 배터리 생산능력은 내년 말까지 30GWh(기가와트시) 이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대규모 수주에도 성공했는데,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7월 테슬라와 연 20GWh 규모 ESS용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었다.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은 테슬라 납품 물량을 연 30GWh로 50% 늘리는 방안을 협의 중이다.
삼성SDI 역시 내년 북미 ESS 시장을 겨냥하며 구체적인 생산 계획을 내놨다. 이미 지난달 미국 완성차 기업 스텔란티스와의 미국 내 합작법인인 ‘스타플러스 에너지’(SPE)의 공장 라인을 NCA(삼원계) 기반 ESS 배터리용으로 전환해 가동을 시작한 상태다. 여기에 LFP 배터리 양산 라인 전환을 통해 내년 말에는 연간 약 30GWh 규모의 미국 ESS 생산능력을 확보할 예정이다.
아울러 삼성SDI 역시 테슬라와의 ESS 배터리 공급 계약을 앞두고 있는 상태다. 논의 중인 계약 규모는 10GWh 수준으로 알려졌다. 추가적인 계약 가능성도 열려 있을 것으로 관측되는데, 테슬라가 ESS 시장 성장과 궤를 함께 한다는 점, 미국 기업의 탈중국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추가 수주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분석이다.
SK온도 북미 ESS 시장 공략에 방점을 찍고 있고, 성과도 일부 나왔다. SK온은 지난달 미국 플랫아이언에너지개발과 1GWh 규모의 LFP 배터리 ESS 공급 계약을 맺었으며, 6.2GWh 규모 추가 프로젝트에 대한 우선 협상권도 확보했다. SK온에 따르면 이외에도 다수의 고객들과 최대 10GWh 규모의 ESS 공급 계약 논의를 진행 중이다.
한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AI 확산으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배터리 셀 업체들의 매출에서 ESS가 차지하는 비중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며 “전기차 배터리 부문이 여전히 핵심 사업이긴 하지만, ESS가 새로운 성장 축으로 부상하면서 업계가 다시 한 번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