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사 족쇄 벗고 초대형 M&A···1조 현금 ‘실탄’ 확보
SK실트론 지분 70.6% 매각 협상···거래규모 2조 안팎
하이닉스 매출 비중 18%···안정적 수요·시너지 기대
테스나 부진 보완 카드···밸류체인 확장 승부수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두산그룹이 지주회사 자격을 일시적으로 잃을 정도로 막대한 현금을 쌓아두며 SK실트론 인수전에 단독으로 나섰다. 지난해 지배구조 리밸런싱 무산 이후 계열사 단위의 인수합병(M&A)만 추진했던 두산은 이번 거래를 통해 그룹 차원의 초대형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기업가치 5조원에 달하는 SK실트론을 품으면 두산은 원전·건설기계에 더해 반도체까지 그룹의 핵심축으로 끌어올리게 된다.
◇ 현금 1조 확보, 지주사 지위도 내려놨다
2일 업계에 따르면 두산은 올해 상반기 두산로보틱스와 두산에너빌리티 지분을 담보로 각각 5500억원, 3600억원을 빌리고, 신용대출로 900억원을 더해 총 1조원을 확보했다. 별도 기준 현금성 자산은 3월 말 1487억원에서 6월 말 1조2385억원으로 석 달 새 8배 이상 불어났다.
대규모 현금 확보의 대가로 두산은 지주사 지위를 내려놓았다. 자산총액이 불어나면서 자회사 주식가액 비율(지주비율)이 50%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공정거래법상 지주사는 부채비율 200% 이하, 지주비율 50% 이상을 맞춰야 한다. 올 6월 말 기준 두산의 자산총액은 6조5843억원으로, 3월(5조535억원)보다 30% 확대됐다. 같은 기간 자회사 주식 장부가액은 3조1704억원으로 늘었으나 지주비율은 48.1%에 그쳤다.
두산이 지주사에서 벗어나면서 계열사 공동 투자, 자회사 지분 확대 등 구조개편의 유연성은 커졌다는 평가다. 지주사 체제에서는 자회사 외 다른 계열사 지분을 보유할 수 없고 증손회사 상장도 제한됐지만, 이제는 이런 규제에서 자유로워졌다. 다른 계열사와의 지분 교환·합작 투자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열릴 수 있다는 얘기다.
◇ 단독 협상 주체로···인수금액 2조 안팎
현금 곳간을 채운 두산의 첫 행보는 SK실트론 인수다. 기업가치 5조원에 달하는 알짜 매물을 품어 반도체를 새로운 성장축으로 끌어올리려는 전략적 선택이란 점에서 시장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다만 두산은 이날 공시를 내고 SK실트론 인수설에 대해 “검토 중이나 확정된 바 없다”고 했다.
매각 대상은 SK㈜가 보유한 지분 51%와 총수익스와프(TRS) 계약을 통한 19.6% 등 총 70.6%다. 초반에는 한앤컴퍼니, MBK파트너스 등 대형 사모펀드(PEF)가 경쟁자로 나섰지만, 자금 조달 부담과 반도체 업황 불확실성으로 물러나면서 두산이 단독 주자가 됐다.
거래 가격은 1조5000억~2조원으로 추산된다. 기업가치 약 5조원에서 순차입금 3조원을 제외한 지분가치만을 반영한 것이다. 두산이 이미 마련한 현금과 차입을 통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다만 대부분이 자회사 지분담보 대출인 만큼 차입 상환과 주가 변동에 따른 리스크가 상존한다.
◇ SK실트론, 국내 유일 웨이퍼 기업···하이닉스 ‘든든한 우군’
SK실트론은 국내 유일의 실리콘 웨이퍼 제조사다.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10% 안팎으로 5위권에 올라 있다. 일본 신에츠화학·SUMCO 등 일본 기업들이 50% 이상을 차지하는 시장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했다는 평가다. 올해 상반기 실적은 매출 9802억원, 영업이익 916억원으로 주춤했지만, 매년 3000억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내왔다.
특히 SK하이닉스에 대한 매출 비중이 18%에 달한다. 업계에서는 “특정 고객사 의존도가 높다는 건 리스크 요인일 수 있지만, 하이닉스가 HBM 증설을 이어가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안정적 매출을 담보하는 장치가 된다”고 보고 있다. 두산 입장에서는 실트론의 가치를 높여주는 ‘든든한 우군’이라는 의미다.
정부는 SK실트론을 ‘국가핵심기술’ 보유 기업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승인이 필요한 이유다. 과거 매그나칩 반도체 매각이 무산된 사례처럼 규제 리스크가 있지만, 국내 대기업으로 이양되는 이번 건은 승인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 두산의 승부수, 반도체를 그룹 핵심축으로
두산은 지난 2022년 시스템반도체 후공정 테스트 기업 테스나를 4600억원에 인수해 반도체 밸류체인에 진입했다. 하지만 테스나는 삼성전자 의존도가 높아, 삼성 반도체 부진의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해 4분기부터 올해 2분기까지 적자를 기록하며 올해 초 코리아밸류업 지수에서도 제외됐다.
이번 SK실트론 인수는 이런 약점을 보완할 카드다. 직접적인 사업 연결고리는 없지만, 웨이퍼 제조와 후공정 테스트 데이터 연계로 신뢰도를 높이고 고객사 다변화를 꾀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두산이 웨이퍼라는 신시장을 확보하면 밸류체인 내 입지를 넓히고, 계열사 간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간 두산은 그룹 차원의 초대형 M&A보다는 계열사 단위 인수로 존재감을 넓혀왔다. 두산밥캣은 지난해 유압기기 제조사 두산모트롤 민수부문을 되사오며 포트폴리오를 강화했고, 두산로보틱스는 올해 미국 로봇 자동화 솔루션 기업 원엑시아를 356억원에 인수했다. 지난해에는 두산테스나를 통해 반도체 후공정을 담당하는 엔지온을 사들였다. 계열사 차원의 ‘스몰딜’로 시장을 넓혀온 두산이 이번에 초대형 ‘빅딜’에 나서는 것은 그룹 차원 체질 개편이 시급하단 판단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