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 방식 8곳 ‘초고속 동의율’···조합도 ‘직접설립’으로 속도전
“2030 고도제한 앞두고 인허가 경쟁”
신탁·조합 질주에 목동 시세 신고가
[시사저널e=길해성 기자] 서울 목동 신시가지 재건축이 ‘속도전’에 돌입했다. 14개 단지 가운데 절반 이상이 신탁을 선택하며 동의율 확보에 속도를 내고, 일부는 정비구역 지정 직후부터 사업시행자 지정을 서두르고 있다. 2030년부터 높이 제한 규제가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로 각 단지가 조기 인허가 확보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 신탁 시행자 지정 박차···“보름 만에 75% 동의 받은 곳도”
29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현재 14개 단지 중 10개 단지(4~10단지, 12~14단지)가 정비구역 지정이 완료됐다. 서울시는 나머지 단지들에 대해 연내 정비구역 지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업 추진 방식은 크게 신탁과 조합으로 나뉜다.
목동신시가지에서는 8곳(1·2·5·9·10·11·13·14단지)이 신탁 방식을 택해 사업시행자 지정 절차를 진행 중이다. 일반적인 재건축은 주민들이 추진위원회를 꾸려 조합을 설립하고, 조합이 사업시행자로서 자금 조달과 설계·분양을 주도한다. 반면 신탁 방식은 신탁사가 자금 조달과 인허가 절차를 주도하면서 주민 갈등과 비리 논란을 줄이고 복잡한 절차를 건너뛰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목동처럼 여러 단지가 동시에 신탁으로 움직이는 사례는 처음이다. 보통 일부 단지만 신탁을 택하거나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만, 목동은 단지들이 경쟁적으로 속도를 내고 있다. 정비구역 지정 직후 곧바로 준비위를 꾸려 동의를 받는 등 동의율 확보 속도가 눈에 띄게 빠르다. 실제로 신탁사 지정에 필요한 75% 동의를 불과 몇 주 만에 채운 단지들이 잇따르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목동10단지다. 지난 19일 전체 소유자 76.9%의 동의를 얻어 한국토지신탁을 사업시행자로 신청했다. 7월 31일 정비구역 지정 이후 불과 50일 만이다. 다른 단지들이 수개월 이상 소요했던 절차를 단숨에 끝낸 사례로 꼽힌다. 준비위원회가 정비구역 지정 이전부터 상가 소유자와 주민을 대상으로 수차례 협의를 진행하고, 법무법인 자문을 통해 법적 리스크를 차단한 것이 비결이었다.
목동10단지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양천구청역·신정네거리역과 5호선 신정역 사에 위치했다. 서울 대표 학원가 중 하나인 목동 학원가와 가까워 교육 환경이 우수하는 평가를 받는다. 재건축이 완료되면 기존 15층, 2160가구에서 최고 40층, 4050가구 규모 대단지로 탈바꿈한다. 재건축준비위원회와 한국토지신탁은 연내 사업시행자 지정·고시를 목표로 내년 1분기 중 정비사업위원회 구성과 설계사 선정을 진행할 계획이다.
목동13단지는 지난 11일 대신자산신탁과 함께 사업시행자 지정 신청을 마쳤다. 지난해부터 추진위와 신탁사가 업무협약을 맺고 꾸준히 협의를 이어온 덕에 정비구역 지정 직후 빠른 속도로 동의율을 달성했다. 같은 시기 목동14단지도 KB부동산신탁을 사업시행자로 지정 신청했다. 3200여 가구에 달하는 매머드급 단지임에도 불과 보름 만에 법정 동의율을 넘기며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목동5단지는 주민설명회 개최 열흘 만에 60% 동의를 확보하며 하나자산신탁과 손잡고 사업시행자 지정 절차를 밟고 있다. 소유주 대비 일반분양 물량이 가장 많아 사업성이 높다는 평가다.
◇ 조합도 질주, 설립 속도 ‘3년→9개월’ 단축
조합 방식을 택한 단지들도 속도전에 합류하고 있다. 3·4·6·7·8·12단지가 해당된다. 속도가 가장 빠른 곳은 목동6단지다. 지난해 8월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뒤 불과 9개월 만인 지난 5월 조합을 설립했다.
통상 재건축은 정비구역 지정부터 추진위 구성, 조합 설립까지 평균 3년 9개월이 걸리지만, 목동6단지는 ‘조합 직접설립 제도’를 활용해 절차를 대폭 단축했다. 조합 직접설립 제도는 추진위원회 구성 없이 주민 협의체와 창립총회를 통해 곧바로 조합을 설립할 수 있는 방식이다. 아울러 지난달 종합건축사사무소 건원을 설계사로 선정하며 14개 단지 가운데 처음으로 설계사 선정을 마쳤다.
목동4단지는 올해 3월 조합 설립 인가를 받았다. 초기부터 상가 소유자와 일반 소유자 간의 갈등을 조율하며 합의를 이끌어낸 덕분에 절차가 비교적 순조로웠다. 현재는 설계안을 마련하고 시공사 선정 절차를 준비 중이다. 목동7·8단지도 조합 설립을 마친 뒤 설계사 선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두 단지는 조합원 수가 많아 의견을 모으는 데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지만 정비사업에 대한 주민 공감대가 넓어지면서 절차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평가다.
목동3·12단지는 아직 조합 설립을 위한 동의율 확보 단계에 있다. 다만 신탁 방식을 택한 단지들이 앞서 속도를 내자 자극을 받아 주민들의 참여 열기도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신탁 단지들의 발 빠른 행보가 조합 단지에도 압박을 주며 전반적인 재건축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 “2030 고도제한 앞두고 인허가 전쟁”···목동6단지 30억 돌파
속도를 내는 배경에는 고도제한 규제가 있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기준이 2030년부터 본격 적용되면 현재 검토 중인 40~49층 아파트 건립 계획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단지별로 인허가를 최대한 앞당겨야 층수 제한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설계를 진행할 수 있어 주민과 신탁사·조합 모두 조기 인허가 확보를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업계에서는 고도제한이 적용되기 전 사업시행계획인가를 받는 것이 현실적인 대응 방안으로 보고 있다. 사업시행계획인가는 교통·환경·재해 영향평가와 건축심의 등 각종 심의를 통과해야 받을 수 있는 행정 절차다. 이 단계가 마무리되면 관리처분계획인가로 이어져 정비사업의 8부 능선을 넘은 것으로 평가된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지난 7월 목동6단지를 방문해 “2030년 이전에 조합을 설립하고 사업시행계획인가까지 마치면 개정안은 상관없게 된다”며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재건축 기대감은 시세로도 확인된다. 목동6단지 전용면적 95㎡는 최근 30억4000만원에 거래돼 처음으로 30억원을 넘어섰다. 목동14단지 전용 71㎡는 20억원, 목동1단지 전용 65㎡는 24억5000만원에 각각 신고가를 경신했다.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으로 갭투자가 제한됐음에도 학군 수요와 재건축 기대가 가격을 지탱하면서 매물이 빠르게 줄고 있다.
전망은 엇갈린다. 단기간에 속도를 내면서 조기 인허가 확보와 사업 가시화 가능성은 커졌지만 신탁사의 자금 조달 능력과 분양 시장 불확실성은 여전히 변수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목동 재건축은 신탁과 조합이 경쟁적으로 속도를 내는 전국 첫 사례”라며 “결국 자금력과 리스크 관리 능력이 단지별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