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밀 탈취 제재 미흡, 방사청 신뢰 추락
절차보다 정치 논리 휘둘리는 사업 결정
선도함 권한·수익 두고 양사 갈등 고조
“몇 년째 제자리걸음···방사청 존재 이유 의심받아”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7조8000억원 규모의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 사업이 2년 가까이 표류하고 있다. 방위사업청(방사청)의 수의계약 고집, 업체 간 갈등, 정치권 개입이 얽히며 K방산의 신뢰도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단순한 수주전이 아니라 방위사업 제도의 투명성과 일관성이 위협받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업계 안팎에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 2년째 멈춘 8조원 프로젝트
KDDX 사업은 국산 기술로 차세대 이지스 구축함 6척을 확보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2023년 12월 기본설계가 완료된 뒤 바로 상세설계와 선도함 건조에 착수할 예정이었으나, 1년 9개월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기본설계를 수행한 만큼 수의계약 방식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화오션은 과거 HD현대중공업의 군사기밀 탈취 전력을 들어 경쟁입찰이나 공동설계를 요구하고 있다. 방사청은 수의계약을 유지하되 한화오션을 부분적으로 참여시키는 ‘상생협력안’을 제시했지만, 한화 측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혼란의 근본 원인은 HD현대중공업의 기밀 탈취 전력이다. 지난 2012~2015년 HD현대중공업 직원 9명이 19차례에 걸쳐 KDDX 설계 자료와 잠수함 문건 등 군사기밀을 빼돌린 사실이 드러났다. 2022년 11월과 2023년 12월 각각 이들에 대한 유죄 판결이 확정됐다.
그러나 방사청은 이 사건들을 사실상 하나로 묶어 3년간 벌점(1.8점)만 부과했다. 일각에선 “2023년 확정 판결은 별개의 사건”이라며 “내년 12월까지 추가 벌점 부과가 타당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방사청 관계자조차 이와 관련해 “별도의 검토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 울산 vs 거제, 지역구 의원들의 ‘대리전’
정치권의 개입은 갈등을 더 증폭시키고 있다. 특히 지역구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다.
울산을 지역구로 둔 의원들은 HD현대중공업을 지지한다. “수의계약이 관례”라며 “울산 경제와 일자리 안정이 걸려 있다”는 논리를 편다. 실제로 울산 지역 국회의원 일부는 지난해와 올해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KDDX 안건을 집중 질의하며 방사청을 압박했다.
반면 거제를 지역구로 둔 의원들은 한화오션의 입장을 대변한다. 이들은 “군사기밀 사고를 일으킨 업체에 또다시 수의계약을 주는 건 특혜”라며 경쟁입찰을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해 7월 거제 지역 의원들이 방사청과 간담회를 열어 “공정 경쟁 보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 선도함은 곧 권력…양보 없는 줄다리기
양사가 끝내 물러서지 않는 이유는 선도함이 가져오는 권한과 수익 때문이다. 첫 번째 배를 건조하는 업체는 단순히 선박 한 척을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개발비를 대거 확보하고, 새로 적용되는 전투체계·장비의 표준을 사실상 자신이 정할 수 있다. 이후 후속함 건조나 해외 수출 때도 이 장비를 중심으로 사업이 이어지기 때문에 영향력이 막강하다.
반대로 두 번째 배를 짓는 회사는 선도함에서 확정된 장비와 설계를 따라갈 수밖에 없어 주도권을 잃는다. 결국 엔진, 전투체계, 레이더처럼 ‘알짜’ 장비를 누가 가져가느냐를 두고 줄다리기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해군 출신 방산 전문가는 “첫 번째 배를 맡는 회사는 개발비를 많이 받고, 장비 개발을 주관하며 이후 해외 수출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며 “결국 선도함을 누가 가져가느냐가 핵심이기에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수출 경쟁력에도 직격탄
문제는 이 같은 갈등이 수출 경쟁력까지 흔들 수 있다는 점이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독일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즈(TKMS)와 함께 캐나다 잠수함 사업 최종 후보에 올라 있지만, 발주처 입장에서는 컨소시엄을 이룬 기업들 사이의 불협화음을 불안 요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 방산 전문가는 “해외 발주처는 가격 경쟁력도 중요하게 보지만 안정성과 신뢰도도 함께 평가한다”면서 “국내에서 사업이 표류하고 정치 논란까지 얽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한국 업체를 믿고 수십조원을 맡겨도 되나’라는 의문이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KDDX는 국산 장비를 앞세워 수출과 자주국방을 동시에 달성하는 사업인데, 몇 년째 표류하면서 방사청의 존재 이유까지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