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 안에만 머문 ‘슈퍼사이클’
수주잔고 40조 vs 상가 공실률 35%···극명한 온도차
하청업체 저임금·정주 여건 부재가 소비 확산 막아
외국인 노동자 비중 20% 육박, 지역 경제 파급력 제한
조선소 내부 자급 시스템, 외부 상권 침체로 직결
폐업 170건·실업률 도내 최고···‘불 꺼진 도시’의 현실
조선업 수주 호황 속에서도 거제 지역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본지는 이 같은 ‘거제의 역설’을 짚기 위해 지난 11~12일 직접 거제를 찾았다.
이번 기획은 총 3편으로 구성된다. 上편에서는 상가 공실률, 아파트 거래량, 실업률 등 각종 수치로 드러난 거제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中편은 상인·조선소 관계자·외국인 근로자들의 삶을 통해 호황이 지역에 어떻게 체감되지 않는지를 현장에서 담아낸다. 下편은 지역 상생발전기금, 산업 구조 다변화 등 해법 논의를 짚는다. [편집자주]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지난 11일 오후 3시 경남 거제시 한화오션 옥포조선소에선 대형 선박 몇 척이 도크 밖에서도 보일 만큼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900톤(t)급 골리앗 크레인이 도크 상공을 가르며 거대한 선박 블록을 천천히 들어 올렸고, 타워크레인들은 자재 꾸러미를 공중에서 이리저리 옮겼다. 대형 도크에는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을 포함한 대형 선박들이 나란히 계류해 시운전과 인도를 앞둔 공정을 밟고 있었다. 도크 주변에서는 지게차와 운반차가 끊임없이 자재를 실어 날랐다.
조선업 ‘슈퍼 사이클’이 도래하면서 3년 치가 넘는 일감을 확보한 옥포조선소는 대형 가스선, 컨테이너선이 동시에 건조되는 ‘풀가동 체제’를 이어가고 있다. 올 상반기 기준 한화오션의 수주잔고는 40조원을 웃돈다. 고부가 선종 비중이 늘면서 수익성도 개선됐다. 올 2분기 영업이익률만 11%를 넘어서며 그룹 편입 이후 처음으로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상반기 누적 영업이익은 6303억원으로, 7년 만의 ‘영업이익 1조 클럽’ 재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같은 날 오후 6시가 되자 옥포조선소 남문 쪽으로 인파가 몰렸다. 안전모를 벗어든 작업자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나오는데, 헬멧 자국이 선명한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 수백 명 규모의 행렬 속에는 피부색이 우리와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파키스탄·방글라데시·베트남·인도네시아 출신 노동자들이 저마다의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 조선소는 풀가동인데···상가 공실률은 35%
호황기를 맞은 조선소와 달리 도크 밖 풍경은 다소 한산했다. 조선소 정문을 지나 아주동 상권, 삼성중공업 인근 장평동 일대는 평일 저녁에도 불 꺼진 점포가 눈에 띄었다. 옥포조선소 남문 맞은편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A씨는 “조선소 안은 바쁘다지만 문밖은 예전 같지 않다”며 “퇴근 시간에 잠깐 몰렸다가도 금세 조용해진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은 바로 기숙사로 들어가 버리니 매출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겉으로만 보면 조선소 안팎은 활기가 넘쳐야 하지만, 데이터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제시 상권은 여전히 비어 있다. 옥포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전년 2분기 28.8%에서 올해 2분기 35.1%로 뛰었다. 고현 지역도 같은 기간 13.9%에서 15.4%로 올랐다. 전국 평균 공실률(13%대)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부동산 거래 역시 위축됐다. 관내 아파트 거래량은 2020년 6800건에서 2024년 3200건으로 반토막 났고, 같은 기간 매매가격지수도 104.4에서 79.16으로 떨어졌다. “조선소는 호황이지만 거제시 상권은 여전히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지역민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 임금 프리미엄 붕괴가 시작점
조선업 불황기의 흔적은 임금 구조에 깊게 새겨져 있다. 경남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7년 조선업 노동자의 평균 연봉은 4340만원으로 제조업 평균(2910만원)보다 1400만원가량 높았다. 위험과 강도, 숙련도를 반영한 ‘프리미엄 임금’이었다. 하지만 2018년 제조업 평균이 4470만원까지 오른 반면, 조선업 평균은 4340만원에 머물렀다. 프리미엄이 사라진 것이다.
현장 임률(시간당 임금)은 최근 몇 년간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여전히 불황기 이전 체감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조선소가 ‘풀가동 체제’를 이어가도 노동자 가처분 소득이 크게 늘지 않으니 지역으로 흘러드는 소비 여력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김춘택 금속노조 경남지부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사무장은 “조선업체들이 사상 최대 흑자를 내고 있는데도 하청노동자들은 올해도 임금이 동결됐다”면서 “지역 경제가 살아나려면 결국 노동자 주머니가 두둑해야 한다”고 했다.
◇ 숙련공 빈자리 채운 외국인 노동자
불황기에 숙련 내국인이 대거 이탈한 자리를 메운 건 외국인 노동자다. 코로나19 이후 발주가 늘어난 2021~2022년, 내국인 복귀는 더뎠다. 임금·근로여건 악화와 ‘재실직’ 우려가 겹쳤기 때문이다.
정부는 인력난 해소를 위해 제도적 문을 열었다. 2022년 4월 용접·도장 등 E-7(전문) 쿼터제를 폐지했고, 같은 해 8월에는 고용허가제 E-9(비전문) 신규입국 쿼터를 확대했다. 2023년에는 조선업 전용 E-9 쿼터가 신설돼 매년 5000명을 한시적으로 배정할 수 있게 됐다.
통계는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공단을 거쳐 취업한 조선업 E-9 인력은 2021년 230명에서 2022년 2667명, 2023년 5540명, 2024년 4022명으로 증가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조사에서도 지난해 1~3분기 조선업 신규 채용 인력의 86%가 외국인이었다.
HD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한화오션 등 빅3 소속 외국인 근로자는 3800명을 넘어섰다. 하청업체 인력까지 합치면 현장 외국인 인력은 1만4000명을 훌쩍 웃돈다. 전체 종사자로 따지면 외국인은 열 명 중 두 명 수준이다.
◇ “돈 벌러 왔는데 돈 쓰라고?”
조선업 신규 채용의 80% 이상을 외국인이 차지하지만, 이들이 지역 상권의 소비자로 자리 잡기는 어렵다. 일각에서는 외국인 노동자 증가가 상권 침체의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하지만 E-9 비자의 최대 체류 기간은 최대 4년 10개월. 가족 동반이나 장기 거주가 구조적으로 막혀 있다. 정주 여건이 부족하다 보니 지역 소비와 주거 수요로 이어지지 못한다.
또 이주노동자들은 국내 취업을 위해 자국 내 브로커에게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에 이르는 비용을 지불하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꼬박 1년은 월급의 상당 부분을 빚 갚는 데 써야 한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들이 퇴근길에 편의점이나 저가 생활용품점에서 소소한 소비를 하더라도, 본국 송금 비중이 높은 만큼 ‘지역 상권을 살리는 소비자’로 남기 어렵다.
◇ “조선소 내부 자급 시스템이 상권 차단” 지적도
일각에선 “조선소 내부 시스템도 지역 상권 침체에 한몫하고 있다”는 불만도 제기된다. 조선소는 하나의 ‘캠퍼스’와 같다. 병원, 편의시설, 식당이 모두 들어서 있고 하루 세끼가 제공된다. 자동화 확대와 함께 여성 외국인 노동자들도 자동용접 모니터링, 소지공(도장 전 표면 정리) 등 다양한 직무를 맡는다. 이들의 일상 동선은 ‘기숙사–사내식당-편의시설’로 고정돼 있다.
퇴근 이후 조선소 밖으로 나가 이뤄지는 지역 소비 지출은 거의 없다. 조선소 내부에서 생활이 해결되는 구조 속에 외부 상권의 매출은 좀처럼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거제시는 올해 들어 이미 식품·공중위생 등 소상공인 사업자의 폐업 건수가 170건에 달했다. 지역 고용지표 역시 부진하다. 지난해 기준 거제시 실업률은 3.4%로 경남에서 가장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