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와 인내의 공식, 쿠팡에서 배터리로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2015년 쿠팡의 창업자인 김범석 의장은 대규모 물류투자 계획을 발표하면서 “100년 기업을 만들기 위해 ‘계획된 적자’를 감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대형마트를 비롯한 국내 유통 3사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공격적인 선언이었지만 “곧 망할 것”이라는 냉소가 더 컸다.

하지만 판은 뒤집혔다. 대규모 투자로 물류 경쟁력을 내재화한 쿠팡은 2023년 첫 연간 흑자를 기록하며 경쟁사의 공세를 막아냈다. 유통업 위기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투자가 시장 장악의 발판이 됐고, 그 효과는 시간이 증명했다.

10년 전 쿠팡이 그랬듯 국내 배터리 산업도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에도 국내 배터리 3사는 과감한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다. 전기차 확산과 에너지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확신이 있어서다. 

LG에너지솔루션은 북미·유럽 완성차 업체와 합작공장을 세우며 수십조원 규모의 생산설비를 확충하고 있다. 삼성SDI도 에너지저장장치(ESS)와 고부가가치 배터리 분야에 장기 투자를 이어간다.

SK온 역시 쿠팡이 증명한 ‘과감한 투자 후 결실’의 공식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3사 중 출발은 가장 늦었지만, 북미·유럽 거점에서 생산거점을 빠르게 확장하며 단기간에 세계 5위권 생산능력을 확보했다. 미국 조지아 공장은 상업 가동 3년 만에 100% 가동에 도달했고, 하루 생산량이 1년 새 3배 가까이 늘었다. 현대차·포드·폭스바겐 등 북미 완성차 업체와의 협력도 확대 중이다.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국내 배터리 산업을 향한 시선은 여전히 엇갈린다. 단기 성과를 중시하는 투자자에겐 대규모 설비투자가 모험처럼 보인다. 최근 일각에선 실적 하락, 투자 회수 지연, 외환 리스크를 이유로 ‘버블론’까지 꺼낸다. 

그러나 산업을 움직이는 건 장부 속 잉크가 아니라 현장의 땀이다. 기술력과 시장 지위, 그리고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이 뿌리다. 협상장에서, 생산라인에서, 연구소에서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은 산업의 엔진이다. 그들의 동력이 꺼지면 산업도 멈춘다. 그래서 지금은 응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몇 년 전 쿠팡을 비웃던 시선은 사라졌다. 10년 뒤에는 오늘의 배터리 산업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 있을 수 있다. 그때 국내 배터리 기업들이 세계 시장의 중심축이 돼 있다면, 지금의 응원은 값진 선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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