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삼성 합병·회계사기’ 무죄 확정
형사리스크 종료로 경영 정당성 확보
지배구조 개편, 중장기 전략 추진 가속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6경제단체·기업인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6경제단체·기업인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마침내 사법리스크에서 벗어났다. 17일 대법원은 이른바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 및 회계사기’ 사건에서 이 회장의 무죄를 확정했다. 2017년 국정농단 사건이후 7년간 이어져 온 형사절차가 모두 마무리된 셈이다.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이날 자본시장법 위반, 외부감사법 위반 등 19개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 대해 1·2심 판결을 그대로 유지하며 무죄를 확정했다. 합병은 경영상 필요에 따른 판단으로 보이며, 사익 편취나 불공정 거래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하급심 판단을 받아들였다. 검찰은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편법 승계’ 수단이라며 기소했지만, 법원은 증명되지 않았다고 봤다.

이번 확정 판결은 이 회장이 수년간 부담해 온 ‘불법 승계’ 프레임에서 벗어났다는 의미가 크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통해 이 회장이 그룹 지배력을 강화한 것이 위법한 것이라는 비판이 이어져 왔으나, 사법부가 이를 합리적 경영 판단 내에 있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이날 판결로 이 회장은 국정농단 뇌물 사건에서의 징역형 확정, 프로포폴 상습투약 혐의로 벌금형 확정에 이어 마지막 남은 형사재판까지 무죄가 확정되며 사법리스크를 완전히 덜어내게 됐다. 형사절차의 종료는 곧 경영권 정당성에 대한 사법적 인정으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이번 판결로 향후 중장기 전략 추진에 걸림돌이 상당 부분 제거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 지배구조 정비 재부상···‘삼성생명법’ 변수

이재용 회장이 총수로서의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면서, 그간 미뤄졌던 삼성의 중장기 지배구조 개편 과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총수 본인의 사법 리스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지배구조 개편이 오히려 정치적·법적 논란을 키울 수 있어, 삼성 내부에서도 조심스러운 행보를 이어왔다. 그러나 ‘불법 승계’ 프레임에서 온전히 벗어나며 이 회장이 직접 구조개편을 주도할 수 있는 명분과 실행 여건이 동시에 마련됐다는 분석이다.

현재 삼성의 지배구조는 ‘이재용→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간접 지배 구조다. 법적으로 순환출자는 아니지만, 우회적 지배로 분류되며 지배력 단순화와 이해상충 해소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가 추진 중인 이른바 ‘삼성생명법’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외부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이 법안은 보험사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을 취득원가 기준으로 총자산의 3% 이내로 제한하는 내용으로,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2025년 3월 말 기준 약 8.51%) 상당 부분이 법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 법안이 통과될 경우 삼성은 이 지분을 처분해야 하며, 이는 곧 그룹 전체 지배구조를 재편해야 하는 상황으로 직결된다. 삼성물산이 삼성전자를 직접 지배하는 구조로의 전환, 또는 삼성생명이 보유한 지분을 시장에 매각하고 이를 특수목적법인(SPC) 등이 인수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다만 삼성물산이 일반 지주회사로 전환할 경우 공정거래법상 자·손자회사 지분 요건 충족이 어렵고, 금융계열사 보유 제한 등도 부담이다. 이런 이유로 삼성 내부에선 정공법보다는 우회적 구조 정비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이번 형사리스크 해소로 구조개편 추진의 정치적 부담이 낮아진 만큼 ‘삼성생명법’ 처리 여부는 삼성 지배구조 재편의 직접적인 트리거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다. 이재용 회장이 책임경영 체제를 구체화할 수 있을지 여부는 결국 입법 환경과 맞물려 움직이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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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리스크 해소로 투자·전략 재편 가속 기대

이번 판결은 삼성의 투자 및 미래 전략 실행 측면에서도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총수 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된 상황에서 이재용 회장은 보다 적극적인 책임경영 체제를 가동할 수 있는 명분과 여건을 동시에 확보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삼성 내부 의사결정의 속도뿐 아니라, 투자 규모·시기·대상에 대한 전략적 범위까지 확대하는 기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삼성그룹은 지난 2022년 5월 ‘역동적 혁신성장을 위한 삼성의 미래 준비’라는 제목의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향후 5년간 반도체·바이오·신성장 IT(정보통신) 등 미래 먹거리 분야에 총 45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2021년 발표한 240조원 규모의 삼성전자 중심 미래산업 투자계획을 그룹 차원에서 확대·계승한 것이다. 삼성은 미국·일본 등 주요 글로벌 시장에서의 생산거점 확대, 스타트업 인수, 유망 기술 기업에 대한 지분 투자 등 다양한 방식의 사업 확장을 추진해 왔지만, 이 회장을 둘러싼 형사사건이 장기화되면서 그룹 차원의 과감한 결단에는 일정한 제약이 따랐다는 분석이 있었다.

이번 무죄 확정은 이 같은 제약을 걷어낸 분기점이다. 단순한 명분 회복을 넘어 삼성 특유의 빠르고 과감한 의사결정 구조가 다시 작동할 여건이 마련됐다는 평가다. 특히 AI 반도체, 바이오, 차세대 디스플레이, 로봇 기술 등 글로벌 메가트렌드 분야에 대한 삼성의 투자 집중도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이 대규모 M&A와 글로벌 사업 확장 등 핵심 전략에 직접 관여하며 ‘이재용 체제’의 경영 색채가 뚜렷해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남은 변수는 ‘국민연금 민사소송’···8월 본격 변론 돌입

다만 국민연금공단이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여전히 부담으로 남아 있다. 이 소송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주주로서 입은 손해를 이유로, 이 회장이 이사로서의 충실의무와 선관주의의무를 위반했다는 주장에 기반하고 있다.

국민연금 측은 “형사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고 해서, 이사회 구성원으로서 주주의 손해를 방지할 의무까지 다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형사재판의 무죄 판단은 민사소송에서의 손해배상 책임을 자동적으로 면책하지는 않는다. 형사재판은 ‘의도적 불법행위’ 여부에 초점이 맞춰지는 반면, 민사소송에서는 손해 발생과 업무상 주의의무 위반 여부가 중심 쟁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지난 6월 26일로 예정됐던 첫 변론기일이 취소됐고, 변론은 오는 8월 28일로 연기된 상태다. 법조계 안팎에선 이 손배사건이 이 회장의 경영책임과 이사로서의 내부통제 의무, 주주 보호의무 등 포괄적인 이사회 책임 이슈로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특히 국민연금이 공적 기금을 운용하는 기관인 만큼,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책임 이행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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