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거듭될수록 시험 난이도 상승, 시험준비도 치열
“‘줄세우기’ 문화가 미취학 7세들에게까지 적용된 행태” 지적도

19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평범한 농촌이었던 대치동이 사교육의 메카가 되기까진 불과 2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현재는 서울 전체 학원의 20% 가까이가 강남구에 있고, 그 중 절반에 달하는 1000개 이상이 대치동에 위치할 정도로 사교육 특구로 변신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의 사교육 진입 시계는 갈수록 빨라져 갔고 해야 할 공부 범위는 늘어만 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대치동의 진짜 사교육 민낯을 해석하고,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 교육을 위한 지혜를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수년 전부터 대치동 7세 아이들이 수준높은 초등 어학원을 합격하기 위해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을 두고 7세고시라는 말은 유명세를 탔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7세고시 열풍은 심해지고, 지문의 난이도는 올라가고 있다. / 이미지=김은실 디자이너
수년 전부터 대치동 7세 아이들이 수준높은 초등 어학원을 합격하기 위해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을 두고 7세고시라는 말은 유명세를 탔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7세고시 열풍은 심해지고, 지문의 난이도는 올라가고 있다. / 이미지=김은실 디자이너

[시사저널e=노경은 기자]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지만 대치동 학원가 한복판을 걷는 초등 저학년 아이들에게선 흔히 볼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롤링백이다. 바퀴가 달려있고 손잡이로 끌고 가는 형태인 18인치 여행용 가방을 생각하면 된다. 학교나 수학학원 갈 때는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영어학원 용도다. 가방 속에는 학원 커리큘럼에 따라 미국교과서, 영어소설, 문법, 단어, 과학, 쓰기 교재 등 무겁고 큰 교재가 5권 내외로 담겨 있다.

롤링백을 끌고 다니면 비오는 날 가방은 비를 맞게 되고 체중이 고작 20킬로그램(kg)대 아이들이 차에 싣기도 꺼내기도 매우 불편하다. 하지만 그대로 사용한다. 롤링백은 어느정도 훈장의 느낌도 있어서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미국인조차 3학년에 배우는 두껍고 무거운 책을 초1에 학습하는 만큼 큰 가방을 끌고 다니는 데에 대한 자부심인 것이다.

실제 아이가 영어학원을 합격해 롤링백을 끌고 다니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다. 7월은 누구에게나 휴가철로 인식되지만 대치동 7살 어린이들에게는 7세고시를 위해 달려야 할 하반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 은마사거리 인근의 유명 영어학원에 롤링백을 끌며 수업을 들으러 가는 초등생 모습. / 사진=시사저널e
서울 대치동 학원가 은마사거리 인근의 유명 영어학원에 롤링백을 끌며 수업을 들으러 가는 초등생 모습. / 사진=시사저널e

◇빅3, 빅5, 빅10 입학을 향해

프랩. 영어 preperation(준비)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대치동에서의 프랩은 실력이 높은 영어학원 합격을 위한 학원으로 통용된다. 즉, 프랩은 학원 입학을 준비시키는 새끼학원이다.

1년 중 하반기가 시작되는 7월은 이름난 영어유치원에 드문드문 빈자리가 생기기 시작하는 때다. 학생들은 프랩으로 옮기거나 때로는 시간당 10만~15만원씩 하는 영어 고액과외를 받기도 한다.

7세고시는 소위 말하는 빅3나 빅5, 빅10 등 대치동의 실력있는 아이들이 모이는 영어학원을 합격하기 위한 각 학원들의 시험을 통칭하는 말이다. 빅3, 빅5, 빅10는 확실히 규정돼있는 것은 아니고 말하는 사람에 따라 순위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피아이, 렉스킴, 에디센, 아이엔, 띵킹, 제이프랩, ILE, MI, 트윈클, 이맥스의 순으로 인식된다.

이들 학원에서는 미국교과서 3학년 교과서를 중심으로 4대영역(독해, 문법, 어휘, 쓰기)을 가르친다. 또한 프랩은 수준 높은 이들 학원에 학생을 합격시키기 위해 1차로 앞서 말한 4개영역의 시험을 준비시키고 1차 합격생을 모아 2차 인터뷰 준비를 거쳐 최종 합격자를 배출해낸다.

7세 수험생들이 가장 애를 먹는 건 쓰기 부문이다. 아직 지식도, 경험도 많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지만 ‘hook-intro-body1-body2-conclusion’까지 문단을 구조화해 기술적으로 에세이를 한바닥 써 내려가야 한다. 심지어 어느 영어학원이든 마침표나 쉼표 등 문장부호를 빼먹으면 감점대상이기 때문에 프렙에서는 혹독하게 가르친다.

그렇다 보니 외국에서 수년간 살며 자유롭게 영어를 배우고 돌아온 리터니들이 되레 대치동 빅3, 빅5 학원 시험은 탈락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빈번하다. 지난해 7세고시 기출을 본 한 고등학교 영어교사는 “리딩 지문이 고1 모의고사 뒷페이지에나 나올법한 고난이도 수준”이라고 밝혔다.

이제 하반기의 시작이자 평균 10월 전후로 치러지는 7세고시 준비를 할 때인 7월이 곧 시작된다. 7세고시는 5세 영어학습 1년차부터 7세 3년차가 되기까지 약 3년간 배운 영어실력을 객관화할 수 있는 인생의 첫 지표이기 때문에 부모의 관심이 높다. 또한 부모의 기대와 걱정을 먹으며 학원 입학을 위한 사교육 시장은 갈수록 덩치를 키우고 있다.

강경숙 조국혁신당 의원은 이달 초 서울시교육청 등 자료를 토대로 지난해 영어유치원 현황을 전수조사한 결과, 서울의 영어유치원 월평균 학원비는 2023년 131만원보다 소폭 오른 135만6000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여기에 프렙이나 과외까지 추가하면 학부모의 총부담 비용은 훨씬 높을 것으로 추산된다. 대치동에서는 일부 소수의 사례가 아니다. 대치동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면 일반 유치원 졸업생은 5명 미만이고 정원의 70~80%가 7세고시 스텝을 밟아온 아이들이다.

7세고시를 합격 후 8살 초등 1학년이 돼 대치동 영어학원에서 사용하는 미교 3점대 교과서. 아메리카 원주민인 체로키족과 이로쿼이족의 역사에 대한 내용 등이 나온다.
7세고시를 합격 후 8살 초등 1학년이 돼 대치동 영어학원에서 사용하는 미교 3점대 교과서. 아메리카 원주민인 체로키족과 이로쿼이족의 역사에 대한 내용 등이 나온다.

◇ “피어그룹이 중요하잖아요”라지만···아이와 엄마의 자존감 문제이기도

대치동 학부모들은 7세고시에 시간과 비용, 노력을 들이는 이유로 표면적으로는 두 가지 꼽는다. 첫 번째는 우수한 ‘피어그룹’ 확보다. 영어는 스스로 사고하고 해결해 나가야 하는 수학과 달리 언어이기 때문에 어려운 시험을 합격해 들어온 실력 있는 아이들 집단에 속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들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체득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두 번째는 수학 공부 시간 확보 차원이라고 말한다. 피어그룹 좋은 학원에서 양질의 수업을 들으며 빨리 영어 진도를 빼놔야 어려운 수학 공부할 시간을 넉넉히 챙길 수 있다는 생각인 것이다. 중고등 사교육 학원 강사들 역시 이 두 가지 이유 모두 일견 타당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학은 스카이냐 지방대냐, 직장은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 사는 동네는 강남이냐 강북이냐 몇평이냐 등 무엇이든 ‘줄세우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특성이 이제 대치동에서는 미취학 7세들에게까지 적용된 행태라고 꼬집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신의 관심사를 찾고 성찰하며 성장하는 게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학원과 비교하고 경쟁함으로써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시기를 맞게 되는 부작용을 겪게 된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또는 같은 반 친구들과의 숲체험 모임에서 “ㅇㅇ이는 어느 영어학원 다녀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이와 엄마의 자존감 문제가 돼버린지 오래다.

전문가들은 학원을 위한 학원을 다녀야 하는 현상을 보고 영어를 잘하게 하기 위한 본질에서는 한참 벗어났다고 말한다. 학부모들은 자녀가 명문대를 합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영재고나 특목고를 가야 하고, 이를 위해 조기에 몰입교육을 해야 한다고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문 사교육이 프랩, 7세고시, 더 심각하게는 명문 영어유치원을 합격하기 위한 4세고시까지 내려왔다는 분석이다.

백병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팀장은 “최근의 영어교육 행태는 단지 자녀가 나잇대에 맞는 영어를 잘하기 위함을 넘어서서 대학 입시를 위해 달리고 있다. 그런데 학부모는 이 루트에 조기 입성하지 않으면 추후에는 진입이 힘들다고 생각하다 보니 어린 나이부터 사교육 시장에서 매 순간 아이를 평가해보는 것”이라고 꼬집어 말했다.

이어 그는 “대치동이 심하지만 사실 대치동 만의 문제도 아니다. 학습지 온라인 사이트만 들어가 봐도 시험문제 풀게 하고 ‘내 아이 전국석차 확인’ 등으로 경쟁과 줄세우기를 시킨다. 학부모는 이 굴레에 내 아이를 편입시키기 위해 매 순간 실력을 확인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사교육 시장은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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