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젠, 파이프라인 다각화···투자 위험 분산
항암제 ‘BAL089’ 급성 골수성백혈병 임상 추진
고형암에서 혈액암으로 연구개발 범위 확대 계획
[시사저널e=최다은 기자] 신라젠이 자체 항암 신약 파이프라인 적응증을 확장해 가치 제고에 나선다. 연구개발(R&D) 범위가 항암 바이러스 치료제 후보물질 ‘펙사벡’에 치우쳐 있다는 오명을 벗기 위한 시도로 풀이된다. 신라젠은 그간 고형암 신약 연구에 집중해왔으나 올해부터 혈액암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는 포부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신라젠은 삼중음성유방암과 위암을 대상으로 임상을 진행 중인 항암제 ‘BAL0891’을 급성 골수성 백혈병(AML) 대상으로 임상을 확대한다. 고형암 대상의 임상뿐만 아니라, 혈액암 신약으로 개발 가능성을 타진해 파이프라인 가치를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앞서 신라젠은 2019년 핵심 파이프라인 펙사벡 간암 임상 3상 실패 후 임상 중단과 경영진 횡령·배임 혐의에 따른 거래정지를 겪은 바 있다. 2022년 10월부터 주식거래가 재개되면서 펙사벡의 적응증 다각화하는 방향으로 개발 전략을 바꿨다. 과거 단일 파이프라인인 펙사벡의 간암 임상 실패로 쓴맛을 본 만큼, 개발 안전성을 도모하겠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신라젠은 펙사벡에 대해 신장암 대상 병용 임상 2a상을 진행 중이다. 또 연육종 및 유방암과 흑색종, 전립선암 대상으로도 글로벌 임상을 전개 중이다.
신라젠은 펙사벡에 기업가치를 온전히 의존했던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약후보물질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난 2022년 9월 스위스 제약사 바실리아로부터 계약금 1400만달러를 포함한 총 3억3500만달러에 항암신약 후보물질 ‘BAL0891’을 도입했다.
BAL0891은 진행성 고형암 치료제로 미국과 한국에서 임상 1상을 진행 중이다. 신라젠은 BAL0891에 대해 삼중음성유방암(TNBC)과 위암(GC) 등 고형암 외 급성 골수성 백혈병(AML)까지 연구 범위를 확대할 방침이다.
BAL0891은 유사분열 체크포인트 억제제(MCI) 계열 항암제다. TTK(트레오닌 티로신 키나제)와 PLK1(폴로형 키나제 1)를 동시에 억제하는 기전을 갖고 있다. 계열 내 최초 신약(First-in-Class)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신라젠이 BAL0891을 AML 치료제로 개발하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BAL0891의 최초 개발사인 스위스 바실리아사가 혈액암 전임상을 진행한 결과, 신약으로 개발 가능성이 보였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는 AML 치료제의 시장성이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은 골수의 조혈모세포로부터 혈액세포가 생성되는 초기 단계에서 발생하는 혈액암이다. 성인 백혈병 중 가장 흔하게 발생한다. 실제 백혈병 환자의 절반 이상이 AML 환자인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급성 골수성 백혈병은 질환 진행 속도가 매우 빨라, 진단 후 치료받지 않으면 1년 이내에 90%가 사망할 정도로 치명적인 질환이다. 재발률이 50% 이상인 만큼 내성 문제에 따른 기존 치료제와 병용 요법, 혹은 신약에 대한 미충족 수요도 높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글로벌 데이터(Global Data)에 따르면 급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 시장은 연평균(CAGR) 13.65% 성장해 오는 2029년에는 51.3억 달러(약 7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신라젠 관계자는 “BAL0891 물질 도입 전, 스위스 바실리아사가 진행했던 혈액암 전임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간 대상의 임상도 준비할 것”이라며 “BAL0891 혈액암 임상시험에는 국내 대형 의료기관이 참여할 예정이고 미국에서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신라젠이 BAL0891의 AML 치료제 개발 과정에서는 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AML은 고형암 대비 환자 모집이 어려울뿐더러 개발 비용도 높다. 특히 신라젠의 파이프라인은 고형암 개발에 특화된 만큼, 혈액암에서는 개발 경험이 전무하다.
무엇보다 국내에서 이미 한미약품과 파로스아이바이오, 바이젠셀이 AML 치료제 국내외 임상 1~2상을 전개하며 시장을 공략 중이다. 신라젠은 연내 임상 1상 개시를 준비 중인 만큼, 선두주자보다 임상 속도에서 밀린다.
한 업계 관계자는 “AML 치료제는 개발 비용이 높을 뿐만 아니라, 이미 임상을 진행해온 기업들도 개발 극초기 단계부터 임상 1상, 효능 데이터 확보까지 수년이 걸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신라젠이 과거 단일화된 파이프라인으로 임상 실패라는 아픔을 겪은 만큼 초기 단계 신약후보물질을 도입하고 적응증을 늘려 개발의 안전성을 도모하는 것은 고무적인 부분”이라면서도 “임상에서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