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현금 파워로 M&A 시장에 ‘큰손’으로 나선 대기업집단
삼성·롯데·한화, 미래 먹거리 발굴에 대규모 빅딜 도전장
[시사저널e=유호승 기자] 고금리·고환율·고물가 등 대내외 경기불황으로 한창 뜨거웠던 기업공개(IPO) 시장은 차갑게 식은 모양새다. 반면 인수합병(M&A) 시장은 대기업집단이 풍부한 현금 파워를 바탕으로 ‘큰손’으로 나서면서 경제계에 지각변동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증시 상승세에 힘입어 여러 기업이 성공적으로 IPO를 완료했다. 그러나 글로벌 증시 부진에 올해 많은 기업들이 연이어 상장 계획을 철회했다. ‘대어’로 꼽히던 현대오일뱅크와 SSG닷컴 등도 IPO를 중단했다. 이로 인해 올해초 25조원 이상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던 IPO 규모는 20조원 수준으로 쪼그라든 상황이다.
IPO와는 반대로 M&A 시장은 매우 활발하다. 국내에서는 롯데와 한화가 M&A에 가장 적극적인 모습이다. 롯데케미칼은 동박 제조업체인 일진머티리얼즈 인수를 눈앞에 뒀다. 일진머티리얼즈가 지난달 19일 실시한 본입찰에 롯데케미칼만 단독으로 참여했다.
일진머티리얼즈는 2차전지의 핵심 소재인 동박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동박은 두께 10㎛(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 이하의 얇은 구리로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장치(ESS) 2차전지 음극집전체에 쓰이는 핵심 소재다.
롯데케미칼이 인수하는 일진머티리얼즈 지분은 허재명 사장이 보유한 주식 53.3%다. 경영권 프리미엄 등을 감안한 인수 금액은 2조5000억~2조7000억원으로 예상된다.
롯데는 일진머티리얼즈를 인수해 동박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방침이다. 인수 완료 후 2조~3조원을 투입해 동박 생산 설비 증설에 나선다. 현재 글로벌 동박 시장에서 일진머티리얼즈의 점유율은 13%로 4위다. 국내 기준으로는 글로벌 점유율 22%인 SK넥실리스에 이은 2위다.
한화는 대우조선해양 인수 작업을 추진 중이다. 한화는 KDB산업은행과 조건부 투자합의서(MOU)를 체결해, 대우조선의 지분 49.3%를 매입하기로 했다. 총 인수 자금은 2조원이다.
한화가 대우조선을 인수하는 목적은 ‘한국의 록히드마틴’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다. 그룹의 신성장동력으로 점찍은 방위 산업에 더욱 힘을 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지상 및 우주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만큼, 군용 선박 사업에 강점을 지닌 대우조선 인수로 육·해·공을 아우르는 종합 방산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목표다.
한화 관계자는 “글로벌 방산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잠수함과 함정 생산이 필수적”이라며 “대우조선을 인수하면 해당 부문의 보완 및 집중이 가능해, 방위 산업에 관한 모든 기반을 갖추게 된다”고 말했다.
국내 빅딜 외에도 삼성전자는 영국의 반도체 설계자산(IP) 기업 ARM 인수를 저울질하는 중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다음달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만나 ARM 관련 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ARM은 소프트뱅크의 자회사다.
ARM은 모바일 반도체 IP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삼성전자가 ARM을 인수하면 엑시노스 등 모바일 역량을 강화할 수 있다. ARM의 인수금액은 최대 100조원에 달할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전자의 올해 2분기 기준 보유 현금 자산은 125조원으로 ARM 인수 여력은 충분하다는 평가다.
현대차와 LG도 유망 기업 인수를 위해 시장을 주의 깊게 모니터링 중이다. 현대차는 로봇·자율주행 등의 분야에 글로벌 투자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고 있다. LG는 최근 미래투자팀을 신설해 전문인력 30여명을 채용했다.
황만순 한국투자파트너스 대표는 “최근 몇 년 동안 IPO 시대가 계속됐지만, 앞으로는 M&A 중심으로 시장이 움직인다”며 “기업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운 증시 환경에서 IPO를 진행하는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