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빠졌지만 기업인 무더기 증인·참고인 채택
본래 목적서 벗어난 국감, 보여주기식 의정활동 전락
[시사저널e=유호승 기자] “국회 국정감사가 본래 취지를 망각하고 국민에 의정 활동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업인을 욕받이로 세워 호통을 주는 자리로 변질된 지 오래다.”
한 기업 대관 담당자의 말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처음 열리는 국정감사를 앞둔 경제계의 긴장감을 대변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여·야 국감 증인 및 참고인 명단을 마무리 짓고 있는 가운데, 올해 역시 많은 기업인들이 증인석에 설 전망이다.
이번 국감은 다음달 4일부터 시작한다.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이재승 삼성전자 사장과 공영운 현대차 사장, 최수연 네이버 대표 등을 국감 증인으로 채택했다.
이재승 사장은 삼성이 스마트폰 및 세탁기 불량에 대한 조치 과정에서 소비자 기만 행위가 있었는지 감사가 필요하다며 야당 측에서 증인으로 신청했다. 공영운 사장이 불린 이유는 현대차가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미리 인지하고 있었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는 임형찬 CJ제일제당 부사장을 비롯해 오뚜기·SPC삼립·BBQ·BHC 대표를 불러 외식 물가 정책 효용성 점검 등을 묻는다. 농협중앙회 국정감사에는 조경목 SK에너지 대표가 면세유 부당 초과이익 환원 약속 이행 여부 파악을 위해 증인 명단에 올렸다.
환경노동위는 원·하청 문제로 박두선 대우조선해양 사장을, 광주 화정동 아이파크 붕괴 사고와 관련해 최익훈 HDC현대산업개발 대표 등을 부른다.
기업 대표 임원의 무더기 출석이 예고되면서 경제계는 올해 역시 ‘망신주기 국감’이 재현될 것으로 확실시하고 있다. 국회가 재계와의 소통을 강조하며 기업과의 접점을 늘려온 것이 단순한 ‘쇼잉’이었다며, 기업인을 불러 호통치고 면박을 주던 과거 폐해가 계속될 것으로 우려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총수들이 증인 명단에서 빠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지만 결정권이 없는 실무 임원이 국회에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이라며 “망신국감을 피하기 위해 각 위원회의 질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의원실과의 소통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선 국감 증인 신청 과정에서 정의선 현대차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의 이름이 거론된 바 있다. 그러나 여야 합의 과정에서 제외됐다.
야당은 증인 출석에 ‘성역’은 없다며 총수들을 대거 국감장에 부르려 했다. 반면, 여당은 윤석열 정부의 친기업 성향과 고물가·고금리로 생존절벽에 내몰린 기업에 부담을 줄 수 없다며 야당의 총수 증인 신청을 거부해 최종적으로 명단에서 빠졌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이름 있는 총수를 증인으로 부르려는 이유는 각 위원회가 제대로 운영 중이라는 것을 국민에 보여주기 위한 연출에 가깝다”며 “과도한 증인 및 참고인 채택은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가로막는 반기업적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번 국감장에 나서는 기업인 중 가장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최정우 포스코 회장이다. 행정안전위원회는 그를 국감장에 부르기로 했다. 자연재해·재난 관련 대책을 논의하는 상임위인 만큼, 최 회장을 불러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태풍 힌남노 피해 상황과 대응 현황 등을 묻기 위해서다.
최 회장은 지난해 산자위 국정감사에 불출석했다. 철강 분야 탄소중립 계획과 실현 방안에 대해 질의응답이 예정돼 있었지만 국감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반면 올해는 출석이 확실시된다.
산자위는 당초 정탁 포스코 대표를 불러 포항제철소 침수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행안위에서 최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하자 정탁 대표를 명단에서 제외했다. 포스코 측에서 최 회장이 국감장에 나서는 만큼, 정탁 대표까지 출석하는 것은 어렵다는 의사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포항제철소 침수는 자연재해로 발생한 불가피한 사고”라며 “복구 작업에 최선을 다해 피해 최소화가 진행되고 있어 최정우 회장이 국감장에 나서 현장 상황을 자세히 전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