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빚탕감 정책, 취약층 배려 방향성은 바람직
채무자의 제도 악용 가능성 감안해 정책 설계해야
[시사저널e=최성근 기자] 한 사례를 소개한다. 건축업자 A씨는 다세대 주택을 지은 뒤 건축주로부터 2억원 가량의 공사대금을 받지 못했다. 이에 법정 다툼에 돌입한 A씨는 판결문을 통해 채권을 확보했으나 건축주의 재산은 압류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건축주 명의의 통장은 남아있는 돈이 거의 없었고, 부동산은 전세권이 설정돼 있거나 신탁 등기가 돼 있었다.
건축주 측은 돈이 부족해 판결 금액을 다 주지 못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건축주는 고가 외제차를 몰고 다녔고 그 가족들은 명품으로 치장하며 여행 목적으로 해외를 오가는 등 서민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A씨는 속앓이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정부는 최근 빚을 갚기 어려운 자영업자 채무를 최대 90% 탕감해주고 청년 채무자의 이자를 감면해주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민간부채가 급증한 가운데 금리까지 크게 오르면서 취약계층의 빚 부담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가하는 데 따른 대책이다. 실제 국내총생산 대비 민간신용 비율은 코로나 사태 전인 2019년말 196.3%에서 올해 1분기 말 219.8%로 늘었다.
민간대출 증가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등 코로나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계층이 빚으로 충격을 버틸 수밖에 없는 이유가 크다. 이 뿐이 아니다. 최근 집값 급등이 이어지면서 추가 상승을 기대한 사람들이 대출을 과도하게 받아 집을 산 여파도 있다. 주식과 가상자산의 ‘빚투’도 한 요인이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빚을 낸 취약층도 있지만 일확천금을 노리고 ‘영끌’ 대출을 한 경우도 있단 얘기다.
경제 전문가들은 경제 정책의 제1순위는 물가 안정이라고 입을 모은다. 물가가 무너지면 경제 근간이 무너지기에 현재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계속 올리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금융 취약계층을 그대로 놓아 둘 순 없다. 이들에 대한 정책적 지원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정부가 내놓은 취약층 금융지원 프로그램은 큰 방향에 있어선 바람직하다고 본다. 다만, 정부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모두 딱한 사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니란 것이다.
기자가 A씨의 사례를 꺼낸 이유는 받아야 할 돈을 떼일 위기에 처한 사람은 빚에 허덕이는 사람만큼, 아니 그 이상 심적 고통을 받는단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A씨는 공사대금이 묶이면서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여러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었다. 그중 하나는 건축주가 혹여나 개인회생을 신청한다면 공사대금을 고스란히 떼일 수 있단 것이었다. 건축주가 신용불량자란 점도 이 같은 걱정을 키웠다.
우리 사회는 빚에 관련한 법제가 채무자에게 관대한 쪽으로 흘러왔다. 빚을 진 사람은 사회적 약자란 관점에서 법정 연체 이자율은 지속적으로 낮아져 왔고, 빚 독촉도 제한 규정이 늘어나는 추세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빚진 자들이 채무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취지이지만 일부 나쁜 의도를 가진 채무자는 이러한 제도들을 악용하기도 한다.
다시 A씨 사례로 돌아오자면, 공사대금은 결국 받았다. 그러나 건축주가 자발적으로 준 것은 아니었다. A씨는 건축주의 재산 중 압류가 가능한 부동산을 발견했고, 즉시 해당 재산을 경매 신청했다. 그러자 돈이 없다며 수년간 버티던 건축주 측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즉시 공사대금 전액을 통장으로 입금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양면성이 있다. 정부가 빚 탕감 정책을 추진할 때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모두 불쌍하다는 전제를 깔면 위험하다. 약자를 돕겠단 방향성은 바람직하지만 약자를 가장해 악용하는 빚쟁이도 있단 점을 감안해 정책을 설계하길 바란다. 선량한 국민들이 빚에 짓눌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네 돈도 내 돈’이란 식의 빚에 둔감한 사회를 조장해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