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e=장민지 경남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팬덤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다보면 팬(Fan)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가장 먼저 설명하게 된다. Fan은 Fanatic의 줄임말로, 어떤 대상에 대하여 광적인 사람을 뜻한다. 사실 ‘미친다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치료의 대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것에 열광하거나 그것에 대해 깊게 파고들고, 모든 면면을 해석하고 탐구하려고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에게 ‘광기’는 하나의 대상을 자신의 일부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좋아하는 작품, 혹은 작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자신의 일부로 삼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해체하고 분석하는 일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비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누가 ‘비평가’의 임무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팬들은 자신의 작품이나 작가들을 분석하고 자신의 경험과 주관으로 이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것은 언어가 되어 다른 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고, 이로 인해 연대나 공동체를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언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발화되는데, 이러한 형식들은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더욱더 고도화되는 중이다. 예를 들어 팬들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이미지, 음악 등이 결합하여 더 큰 창작의 형태로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해낸다.

한때 수용자, 즉 팬들이 생산한 텍스트들을 한데 묶어 ‘2차 창작’이라고 불렀던 때도 있었다. 2차 창작은 여전히 대중에게 통용되는 용어이긴 하지만, 원본을 넘어서고 초월하는 창작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생산된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모두 2차라고만 부를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원본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 감응을 주어 무수히 많은 언어들을 만들어낸다.

지난 8월 6일 개막한 ‘아르토, 고흐’라는 창작 뮤지컬은 고흐에게 미쳐있었던 프랑스의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라는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사회적으로 정신병자로 낙인찍힌 아르토가 또 다른 ‘미치광이’로 불렸던 다른 시대의 고흐와의 감응을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 위로, 우리가 어떤 대상의 팬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는 질문이 덮였다. 우리는 어떤 공연이나 텍스트를 받아들일 때, 그 텍스트가 자신의 언어와 육체를 관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가 경험한 것들은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레퍼런스가 되고, 그것은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연다.

그래서 무언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넘어설 수 있는 자신의 주관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을 종일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또한 창작의 일환이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덕질은 자신을 관통하고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기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순간일 수 있다. 그것이 철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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