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반면교사 삼고 中 업계와 기술 격차 지속해야

19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은 당시 중국을 두고 “공간만 있고 시간은 없는 곳”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땅덩어리는 넓은 데 반해 이렇다 할 발전이 없다는 소리였다. 오늘날 중국엔 한참 맞지 않는 말 같다. 특히 디스플레이 산업에 있어선 더욱 그렇다. 현재 중국 디스플레이 기업들은 선발 업체가 벌려놓은 기술 격차의 ‘시간’을 마구 좁히는 중이다.

기자가 조언을 구한 전문가들은 중국과 국내 업계의 경쟁을 두고 “애초에 불공정한 게임”이라고 입을 모았다. 디스플레이 산업은 장치산업 특성상 대규모 생산설비가 기업 경쟁력을 좌우한다. 공장에 투입되는 유리원장이 클수록 더 큰 패널을 싸게 찍어낼 수 있는 원리다. 중국 패널 업체는 각 지역마다 별도 법인을 꾸려 공장 증설 시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의 이중 지원을 받는다. 대규모 증설 투자에 거침이 없다.

중장기적으로 사업 수익성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투자를 고심하는 국내 업계는 힘이 빠진다. 대규모 설비 투자를 하고도 수요가 부진해 실적을 내지 못할 경우 기업 경영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디스플레이 장비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설비 투자를 두고 “잘 되면 이득인데, 안 돼도 큰 손해는 없다는 식”이라고 평가했다. 이미 LCD 디스플레이 시장은 중국 업계가 주도권을 잡았다.

일각에선 일본이 한국에 디스플레이 기술 주도권을 넘겨준 것처럼, 또 다시 중국에 시장 패권이 넘어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일본 패널 제조업계는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 샤프는 대만 홍하이그룹으로 넘어갔고 JDI는 5년 연속 적자를 내면서 휘청거렸다. 지난해엔 전직 임원 횡령 혐의까지 겹쳤고 올초엔 일본 하쿠산 공장의 설비 일부를 팔았다. 2000년대 이전만 해도 LCD 시장을 독점하던 일본은 20년여만에 처참한 꼴이 됐다. 기술 흐름을 읽지 못 하면서 투자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일본 패널 제조사들은 결국 기술 격차를 벌릴 시간을 놓쳐 뒤처졌다. 전방 세트업계가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눈을 돌릴 때 기술 개발에 집중하지 못 했다. 국내 업계 역시 중국과 기술 격차를 벌릴 시간이 많지 않다. 중국 업체가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개발 중인 OLED 패널은 국내 업계 제품에 비해 품질이 낮고 수율도 좋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애플이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를 넘어 중국 BOE 아이폰용 OLED 패널 채용을 검토 중이고 삼성전자 역시 중국 업체 스마트폰용 OLED 구입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중국업계가 OLED에서도 기술 격차 좁히기에 여념이 없다. 여기에 BOE나 CSOT 등 선두 기업들은 중소형 OLED를 넘어 TV용 대형 OLED 기술까지 넘본다. 중국은 더 이상 공간만 있는 땅이 아니다. 시간이 없는 건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일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