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종합보험 가입 시 경찰 ‘불기소 처분’ 유리, 피해 가중 비판…“제도 폐지 앞서 경찰 인력 확충해야”
그간 지지부진했던 교통사고처리특례법(교특법) 폐지 논의가 급물살을 탈지 주목된다. 현행 교특법은 교통사고 피해자들을 2차 피해에 노출시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종합보험에 가입 돼 있을 경우 경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릴 여지가 커 억울한 피해자들을 양산해왔다는 지적이다.
교특법 폐지에 찬성하는 전문가들은 경찰의 역량을 키워 의무신고제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경찰은 제도 개선을 위해 인력 확충을 요구하고 있다.
교특법은 종합보험에 가입한 가해자가 12대 중과실(뺑소니, 음주운전 등)을 저지르지 않으면 형사책임을 면제한다. 피해자가 중상해 인명사고를 당하지 않은 경우도 해당된다. 교통사고로 인한 국민들의 불편을 신속하게 해결하고 범죄자 양산을 억제하기 위해 1981년 제정됐다.
그러나 입법취지와는 다르게 가해자를 위한 편의가 너무 과하다는 비판이 계속돼왔다.
17일 주승용 국회부의장의 주최로 열린 ‘교통사고처리특례법 개선을 위한 릴레이 정책 세미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교특법의 문제가 ‘보험처리’에 있음을 지적했다. 보험처리로 경찰의 역할이 줄고 오히려 보험회사 직원이 합의를 진행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는 ‘공소권 없음’ 처리 건수가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다.
현행법상 합의하거나 종합보험, 공제에 가입한 경우 교통사고처리대장에 등재하는 것으로 처리절차를 종결하고 형사입건하지 않는다. 이렇게 사건이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되면 2차 피해 발생에도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어려워질 수 있다. ‘공소권 없음’ 처분을 받은 가해자에게 재고소가 불가능해서다.
◇ 한해 교특법 위반사범 ‘공소권 없음’ 처리 건수 12만건 이상…경찰역할 부족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교특법 폐지 관련 논의가 지속적으로 올라오고 있다. 작년 12월 8808명의 지지를 받은 ‘도로교통특례법 다시 만들어야’ 게시글의 청원인은 가해자 입장에서 작성된 조서 때문에 운전자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고 호소했다. 운전자는 교특법상 12대 중과실(중앙선, 보도 침범)을 저질렀지만 사고지점이 아파트 단지(개인 사유지)라서 단순 보험처리 됐다.
올해 6월 작성된 ‘10km대의 경미한 교통사고로 대학병원 3개과에서 고도후유영구장해진단을 받은 억울한 사연’ 게시글에서 청원인은 2012년 당한 뺑소니 사고가 평생 지울 수 없는 장애를 남겼다고 주장했다. 청원인은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경찰, 검찰이 경미한 교통사고로 보험처리해 패소했다”며 “이는 2012년 6월의 뺑소니 사건에 대해 불기소(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려서다”고 적었다.
교특법 위반사범 중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된 인원은 해마다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된 인원은 2011년부터 2016년까지 평균 12만명을 넘겼다. 전체 교특법 위반사범의 약 62~65%를 차지한다. 이는 한해 기소되는 음주운전 전과자와 비슷한 수치다.
이에 경찰의 신고의무제도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교통사고 시 경찰에 신고하기 보다는 보험회사에 신고하는 경향이 늘어나 많은 사건들이 ‘공소권 없음’ 처리됐다는 것이다. 실제 교통사고 발생 시 경찰에 신고하는 비율은 일본 97%, 미국 75%에 비해 한국은 19%로 상당히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윤해성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실장은 “공소권 없는 교통사고에 대해 보험처리를 유도하는 경찰의 잘못된 관행을 억제해야 한다”며 “교통사고도 일반 형사사건으로 처리하되 간략하고 신속한 처리 방법도 동시에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 전문가, “경찰 신고 의무화 필요해”…경찰, “부담 덜어줄 방안 제시해야”
전문가들은 교특법이 폐지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교특법이 공식적인 사고확인을 막고 있고 이로 인해 보험사기, 안전 불감증, 도덕적해이, 인명경시 풍조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배상균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교특법이 본래 법의 취지와는 다르게 형사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점만 부각되고 있다”며 “안일한 사고대응 인식 증가로 교통 법규 위반은 물론 교통사상사고 발생률의 증가도 초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해성 실장은 “교특법이 없는 외국의 경우 교통사고증명서 첨부를 통해 보험처리를 받도록 하고 있다”며 “교특법 폐지 이후 신고의 의무화, 정확성 향상이 진행되면 객관적 사고 피해 자료 부족으로 인한 불이익을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 실장이 제시한 방법은 ▲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과 연동한 사진 및 동영상 제보 활성화 ▲ 경찰, 보험회사, 공제조합에 교통사고 통합 데이터베이스를 구축·공유 ▲ 공인된 진단서를 활용해 허위진단서로 인한 보험금 수령 제한 ▲ 교통경찰관의 역할 확대로 보험처리 유도 방지 ▲ 경찰신고의 의무화 및 자동차 보험 청구 시 경찰의 ‘교통사고사실확인원’ 첨부 의무화 ▲ 경찰의 인력부족 해결을 위해 범칙금과 벌점 부과 유예제도 시행 등이다.
경찰은 부족한 인력을 보충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장선 충남지방경찰청 경감은 “경찰관 중 교통을 담당하는 실무자는 3445명이며 교특법이 폐지되면 10배 이상 인력충원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교특법은 운전자 처벌 목적이 아니라 피해보상의 목적이 크기 때문에 신고 의무는 도로교통법 54조 2항을 개정하는 것이 옳지 않냐”고 말했다.
이어 이 경감은 “모든 일을 경찰이 담당할 수 없다”며 “인력충원이 힘들다면 3800명에 달하는 도로교통사고감정사를 경찰서 권역별로 투입해 교특법 폐지로 인한 충격을 상쇄시킬 수 있을 것이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