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뿐인 8년, 피해 보상 협의 ‘안개’가 안 걷힌다 -삼성전자·피해자가족·조정위원회 등 당사자간 불신 커 이견 못 좁혀

7일 케이티엔지(KT&G) 서대문 빌딩 1층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공유정옥 반올림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사진=민보름 기자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 보상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 6차회의가 소득 없이 끝났다.

7일 법무법인 지평에서 열린 이날 회의는 조정위원회 권고안에 대한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피해자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 삼성전자 등 세 당자사 의견을 듣고 수렴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반올림과 삼성전자는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었다.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됐다. 이미 가대위는 “신속한 보상을 위한 조정 보류”를 요청했다. 가대위는 삼성전자가 자체적으로 만든 보상위원회(보상위)에서 피해자 보상을 끝낸 뒤 조정을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반올림은 삼성전자가 자체 보상위를 꾸린데 대해 비판했다. 반올림은 삼성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끌고 가기 위해 자체 보상 창구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는 8년여를 끌어온 사안으로 보상위에 직접 상담을 요청한 사람이 70명을 넘겼다.

일각에선 보상위 구성으로 인해 조정위가 무력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한다.  조정위는 직업병 문제 당사자를 중재하기 위해 구성된 독립 기구로 이번에 6차 회의가 소득 없이 끝남으로써 조정위의 역할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누가 권고안을 어기고 있나

비공개로 열린 조정위 6차 회의에서 가장 오래 논의된 것은 보상위원회 문제다. 일부 참석자들은 이에 대해 논쟁이 치열했다고 전했다.

반올림은 회의가 열리기 30분 전에 건물 1층 로비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보상위를 구성한 삼성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조정위는 지난 7월 보상기준과 재발방지 대책을 명시한 권고안을 내놨으나 반올림 측은 권고안 속 보상 기준과 보상위 기준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황상기 반올림 대표는 “반올림 측은 조정위 구성을 원치 않았으나 삼성이 원해서 지난해 12월부터 조정위가 시작된 것”이라며 “조정위를 만들자던 삼성이 권고안이 자기쪽에 불리하다고 생각해 개별적인 보상안을 가지고 나왔다”고 밝혔다.

반올림은 지난달 22일 삼성 보상안이 권고안보다 보상 대상을 축소하고 있다는 자료를 내놨다. 보상위가 권고안과 달리 1996년 이전 퇴직자와 불임, 유산 피해자를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

삼성은 피해자에 대한 신속한 보상을 위해 보상위를 꾸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보상위에 참여하고 있는 가대위는 지난 8월10일 삼성과 직접 협상에 나설 때부터 ‘신속한 보상’을 요구했다.

삼성은 반올림이 비공개로 조정위에 제출한 권고안 수정제안을 문제삼고 있다. 백수현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 전무는 회의 후 인터뷰에서 “반올림이 8월 조정위에 제출했다는 수정 제안을 우리는 10월2일에야 보게 됐다”며 “대략 15개 항목이 있는데 우리는 이같은 요구가 결국 권고안을 따를 수 없다는 뜻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삼성은 특히 매년 순이익의 0.05%를 보상·재발 방지 관련 법인에 기부하라는 반올림 측 제안에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법인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모르는데 무기한 돈을 낼 수는 없다는 얘기다.

반올림이 조정위에 제출한 수정의견 일부/자료=반올림 제공

반올림 측은 삼성 주장을 반박했다. 이종란 노무사는 “우리는 재발방지 대책 등 권고안의 기본 뿌리는 지키되 보상 기준에 있어 세부적인 부분을 수정하자는 것”이라며 “오히려 재발방지를 위해 투명한 기구를 만들라는 권고안을 무시하고 보상위를 만든 삼성이 권고안을 어기고 있다”고 말했다.

이 노무사는 “(반올림은) 수정 제안대로 하자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이 부분을 다시 논의하자고 한 것인데 삼성이 마치 우리가 밀어 붙이는 것처럼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해결 주체 간 갈등으로 고통 받는 피해자  

8년을 거치며 문제가 복잡하게 꼬였다. 이에 따라 피해자들의 의견도 갈리고 있다.

현재 피해자 조직은 크게 반올림과 가대위로 나눠져 있다. 가대위는 원래 반올림에 참여했던 피해자 6명과 가족이 독립해서 만든 단체다. 가대위는 지난 8월부터 삼성과 직접 협상에 나섰다.

가대위가 지난달 3일 삼성전자 보상위 설립에 동의하고 여기에 참가하면서 가대위 안에서도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정애정 가대위 간사는 가대위의 노선과 달리 보상위에 보상신청을 하지 않은 채 삼성전자 서초 사옥 앞에서 일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송창호 가대위 대표는 “반올림은 재발 방지 대책과 보상을 묶어서 협상하고 있다. 그 때문에 8년 동안 협상이 진척되지 않아 답답했던 것도 사실”이라며 가대위를 꾸리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삼성이 (보상위를 만들면서) 권고안 보다는 높은 수준에서 보상하겠다고 했다”며 “보상이 끝나면 재발방지도 상식적인 수준에서 하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반면 반올림과 정 간사는 “삼성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올림은 삼성이 보상위를 통해 피해자 일부에게만 졸속으로 보상한 후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 천안 엘시디(LCD)공장 근로자였던 고(故) 윤슬기 씨 어머니 신부전 씨는 “서너 명에 불과한 가대위가 피해자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언론에 나가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루프스로 투병 중인 반원희 씨도 “모든 피해자가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간사는 “8년 동안 신속한 보상을 바란 건 우리였는데 갑자기 삼성이 보상을 빨리해주겠다니 졸속이 아닌지 의심된다”며 “삼성이 보상 심사나 피해 진단을 스스로 뽑은 전문가에게 맡긴다는 것 자체가 투명하지 못하다”고 밝혔다.

그는 “하지만 당장 병원비가 부족하거나 생활이 힘든 피해자도 많은데 반올림이 보상 문제 협상을 미루는 것도 문제”라며 “몇몇 피해자에게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었고 삼성이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라고 말했다.

◇ “조정위원회 지속돼야”

삼성 보상위에서 피해자 보상금 지급을 끝내면 조정위가 무력화 될 것이란 의견도 나온다.

내부적으로 조정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다수다. 피해자들과 삼성전자는 조정위 운영 자체에 대해선 큰 불만이 없다는 입장이다. 송창호 가대위 대표도 “권고안에 제시된 보상금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조정위도 공정하게 당사자 모두의 입장을 고려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정위 구성 이후 논의에 진전이 있었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애정 간사는 “조정위가 시작되면서 각 당사자가 차분하게 자기 입장을 밝히게 됐다”며 “그 전에는 흥분한 활동가가 고성을 내거나 삼성이 자기 얘기만 하다 말꼬리를 잡는 등 대화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정위 구성도 중립적인 편이라는 평가다. 조정위 위원장은 김지형 전 대법관이다. 김 위원장은 가대위에서 추천했다. 정강자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백도명 서울대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김 위원장이 뽑은 위원들이다.

그래서인지 조정위나 조정위 권고안 자체에 대한 불신은 별로 없다. 하지만 1년 미만 근무자가 보상 대상에서 빠지는 등 논란은 여전하다. 삼성전자 백혈병 사태가 해결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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