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강세·해외투자·서비스수지 악화가 원화 약세 만들어
반도체·조선은 환산이익 늘고 철강·석화·항공·소재업계는 원가 비상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원·달러 환율이 1500원선을 눈앞에 두는 고환율 국면이 이어지면서 기업들의 표정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고환율은 수출기업 호재'라는 공식이 떠오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해외투자 규모와 원자재 수입 구조에 따라 수익성이 정반대로 움직이는 양상이 뚜렷하다. 특히 이번 고환율이 단기적 급등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상단을 높이는 방향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기업들은 사업계획과 환리스크 관리 전략을 전면 재점검하는 분위기다.
최근 환율 상승을 이끄는 핵심 요인은 달러 강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금리 인하를 시작했지만 물가·임금 지표가 쉽게 꺾이지 않으면서 완화 속도는 시장 기대보다 느리게 전개되고 있다. 일본의 초완화 정책은 엔저를 공고히 하고, 중국 경기 둔화와 중동발 지정학 변수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자금이 다시 달러 자산으로 몰리는 흐름이 강화됐다. 국내 요인도 만만치 않다. 국민연금, 연기금, 서학개미, 대기업 등 경제주체 전반의 해외 투자가 빠르게 늘면서 수출로 벌어들이는 달러보다 해외로 빠져나가는 달러가 더 많은 상황이 구조적으로 고착됐다. 서비스수지 적자 확대까지 더해지며 “수출 증가 → 증시 개선 → 환율 하락”으로 이어지는 전통적 메커니즘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동향분석실 양지원 수석연구원은 “내년 환율도 1400원대 상단에서 등락할 가능성이 크다”며 “고환율이 단기적 변수가 아니라 경제 구조 변화로 인해 상단이 높아진 흐름”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4분기 수출업체 조사에서도 환율 변동성은 여전히 주요 리스크 요인”이라며 “기업들은 수치 자체보다 변동폭 확대를 더 부담스러워한다”고 말했다.
◇ 반도체·조선·자동차는 ‘상대적 수혜’…수익 구조 따라 온도차 뚜렷
수출 중심 업종 가운데서는 반도체·조선·자동차가 대표적인 수혜 업종으로 꼽힌다. 반도체는 매출 대부분이 달러로 발생하고 HBM 등 고부가 제품 비중이 확대되면서 고환율이 원화 환산 실적에 직접 반영된다. 업계에서는 “환율이 10원만 움직여도 분기 이익 추정치가 달라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메모리 가격 반등과 AI 서버 투자 확대로 환율 효과가 겹치는 구간에서는 실적 개선폭이 더 커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조선업도 선박 계약은 달러로 체결되고 인건비·부품비 등 주요 비용은 원화로 지출되는 구조다. LNG선·초대형 컨테이너선 위주 수주가 이어지면서 고환율 구간의 마진 개선 폭은 과거보다 더 뚜렷하다는 평가다. 자동차 역시 국내에서 부품을 조달해 해외에서 판매 대금을 달러로 받는 구조라 순외화수지가 안정적이다. 현대차·기아의 경우 환율 1% 상승 시 영업이익이 수천억원씩 증가한다는 추정은 증권가의 대표적인 컨센서스다.
다만 완성차의 해외 생산 비중 증가, 반도체·조선의 장비·소재 수입 확대 등으로 인해 “고환율=일방적 호재”라는 과거 공식은 약해졌다. 기업별 매출 구조와 환헤지 전략에 따라 환율 민감도가 크게 달라지는 환경이 됐다는 점에서다.
◇ 철강·석화·정유·항공·소재는 원가 직격탄…2차전지는 기업별 손익 엇갈려
철강·석유화학·정유·항공·유통 등은 고환율의 부담이 가장 큰 업종이다. 철강업계는 철광석·원료탄 등 핵심 원료 대부분을 달러로 수입하는데, 중국 경기 둔화로 판매단가 인상이 어려운 상황에서 환율 상승은 곧바로 제조원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석유화학·정유업도 원유·나프타 등 기초 원료를 전량 달러로 들여와 환율이 10% 오르면 원가 부담이 조 단위로 늘어난다는 계산도 제시된다. 항공업은 유가·정비비·리스료·항행료 대부분이 달러 결제로 이뤄져 고환율 구간이 길수록 수익성 방어가 쉽지 않다.
유통·식품·헬스케어 등 해외 소싱 비중이 높은 업종도 환율 변동폭이 10%만 확대돼도 영업이익률이 뚜렷하게 흔들린다. 일부 기업은 가격 전가를 시도하고 있지만 소비 둔화가 겹치며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2차전지 산업이다. 미국·유럽 공장 CAPEX와 달러 부채 증가로 ‘대표적 환율 피해 업종’으로 분류돼 왔지만,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은 선도계약·통화스왑을 통해 외화부채 평가손실을 상당 부분 상쇄하고 있다. LG엔솔은 “환율 10% 상승 시 세전이익이 2367억원 증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고환율이 자동적으로 ‘배터리 업종 전체의 부담’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업별 현금흐름·매출 구조·환헤지 전략에 따라 손익 효과가 크게 달라지고 있는 셈이다.
양지원 수석연구원은 업종별 차이에 대해 “한국은행 산업연관표를 보면 해외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업종일수록 환율 민감도가 높다”며 “달러가 오르면 조달 비용이 즉각 증가해 생산 원가로 이어지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업들은 절대 수준보다 변동성을 가장 큰 리스크로 본다”며 “환헤지는 필수지만 불확실성이 커 협상력·계약 조건에 환리스크를 얼마나 녹여내느냐가 관건”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