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의 새 정의 : 지속 가능성을 향한 여정
어떻게 만들었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살아남는다.
나는 시계를 좋아한다. 무언가를 좋아하면 또 다른 세계가 넓어지는 느낌이다. 시계는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물건 중에 거의 유일하게 살아 움직인다. 작은 크기에 소재, 스토리, 디자인, 기능적 혁신을 우겨 넣어야 하고 정확도까지 잡아내야 한다. 이제는 거기에 지속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니, 관전하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더 흥미진진해질 수밖에 없다. 스마트 시계가 대세인 요즘, 기계식 시계는 그야말로 취향의 표현이자 럭셔리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내가 늘 마음에 품고 있던 파네라이Panerai 시계를 구매하고자 매장에 들렀다. 럭셔리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파네라이 시계는 그만의 독특한 디자인 아이덴티티와 스토리, 그리고 ‘파네리스티Paneristi’라 불리는 열정적인 시계 팬들만으로도 나에겐 럭셔리로 다가온다. 특히 내가 끌렸던 부분은 럭셔리 시계 산업에서 본격적으로 재활용을 강조했다는 점뿐 아니라, 그들이 시계를 만드는 과정을 공개하는 방식과 이유였다.
파네라이는 시계 산업의 ‘재활용 실험실’ 역할을 자처하며 ‘이-스틸e-Steel, 파네라이의 새로운 재활용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과 ‘이랩-아이디eLAB-ID’ 같은 프로젝트로 판을 흔들었다. 2021년부터 선보인 이-스틸 적용 제품들은 시계 무게의 58.4%를 재활용 기반 소재로 구성했고, 같은 해 공개한 콘셉트 모델 섭머서블 이랩-아이디Submersible eLAB-ID는 무게의 98.6%가 재활용 기반이라는, 업계 최고 수준의 수치를 제시했다. 심지어 슈퍼루미노바와 실리콘 이스케이프먼트까지 100% 재활용 소재를 적용했다. 더 인상적인 건 이 노하우를 독점하지 않고, 공급 파트너 리스트까지 공개하며 “산업 전체의 지속 가능한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싼 럭셔리 제품을 사면서 재활용이 웬 말이냐며 혀를 차기도 하고 ‘그돈씨’그 돈이면 ~하겠다의 신조어를 외치기도 한다. 그러나 지속 가능성은 단순히 가성비로만 판단할 수 있는 가치의 범위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선택의 기준이다.
럭셔리 산업은 오늘날 지속 가능성이라는 거대한 과제 앞에 서 있다. 장인정신과 희소성을 자랑해 온 럭셔리 제품들이지만, 그 뒤편에는 환경과 사회적 문제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내가 비싸게 산 명품들이 환경오염, 노동과 인권 착취, 동물 학대, 허위 과장광고의 산물이라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 이유 때문에 럭셔리 산업은 요즘 ‘빛나는 것’에서 ‘빛나게 만드는 것’으로 질문을 바꾸고 있다. 더 비싼 가죽이나 더 희귀한 소재를 쓰느냐가 아니라, 그 소재가 어디서 왔고 누가 만들었으며 제품의 수명이 얼마나 길게 이어지고 환경과 사회에 주는 부정적 영향을 어떻게 최소화하느냐, 이런 것이 새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브랜드 로고의 권위만으로는 부족하고, 지속 가능한 가치를 담은 스토리와 헤리티지, 그리고 공급망의 상생과 혁신이 브랜드의 품격을 증명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변화의 흐름은 이미 여러 제품에 각인되고 있다. 지속 가능성은 플라스틱병을 재활용하는 것 정도로 이해되곤 하지만, 프라다PRADA는 이 통념 자체를 비즈니스 체계로 바꿔나가고 있다. 2019년 시작한 ‘리-나일론Re-Nylon’은 바다에서 수거한 폐그물과 섬유 폐기물을 화학적으로 재생해 만든 나일론인데, 지금은 컬렉션 전반으로 확장했다. 유네스코 IOC정부간 해양학위원회와 함께 다음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지속 가능한 해양 보존 교육 프로젝트인 ‘시 비욘드SEA BEYOND’ 또한 2019년부터 이어오고 있다. 프라다는 환경 친화적인 소재 혁신을 필두로 문화와 교육까지 연결하는 노력으로 지속 가능성을 ‘소재’에서 ‘세대’로 확장한 좋은 케이스로 평가받는다.
샤넬은 장인정신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체계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21년 파리 외곽에 문을 연 2만5500㎡ 규모의 패션 메티에르 복합 공간인 르 디프네즈 엠Le19M은 메종의 여러 장인 하우스를 한 지붕 아래 연결한 ‘지속 가능한 장인 생태계’ 그 자체이다. 이곳에서 기술 전수, 교육, 전시가 지속적으로 순환하며 장인의 기술과 노하우가 다음 세대의 일자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또한 ‘샤넬&무아CHANEL & Moi’ 같은 수선·복원 서비스는 제품의 수명을 연장하는 현실성 있는 순환 경제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럭셔리의 내구성은 단지 소재의 강도만이 아니라 제품에 대한 진정성 있는 돌봄의 체계 구축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이탈리아 움브리아의 작은 마을 솔로메오에 본사를 두고 있는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는 한발 더 나아가 인본주의를 경영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 철학은 공정 임금과 노동의 존엄, 지역 공동체에 대한 상생과 환원을 기업의 성과와 동일 선상에 놓는다. 한마디로 ‘사람과의 상생과 지속 가능성’을 재무제표만큼 중요하게 취급하는 방식이다.
그룹 단위의 시스템 전환도 가속 중이다. 구찌Gucci,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등 수많은 럭셔리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는 케어링Kering은 2012년부터 EP&L환경 손익계정을 도입해, 원재료부터 유통까지 전 가치사슬의 환경발자국을 화폐가치로 계량화하고 경영 의사결정에 반영한다. 말뿐인 ESG가 아니라 경영과 정량적 수치로 지속 가능성을 관리하는 체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LVMH 또한 2021년 그룹의 중장기 지속 가능성 발전 로드맵인 LIFE 360을 발표했다. 2023년-2026년-2030년의 단계별 목표를 ‘창의적 순환, 생물다양성, 기후변화 대응 및 추적가능성’ 등 4가지 축으로 관리하는 모델이다. 이 중장기 계획 안에는 내부 직원에 대한 기후 교육, 공급망 지속 가능성 관리, 플라스틱 제거 등의 패키지 혁신과 같은 구체적인 과제도 포함됐다.
원석과 광물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 노동, 안전 및 환경문제에 노출되어 있는 하드 럭셔리 산업에서는 보석과 광물의 원산지와 생산 과정에서의 윤리성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추적가능성’과 산업 전체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연합’이 지속 가능성의 핵심 키워드다. 까르띠에와 케어링 그룹이 2021년 공동 발족한 WJI 2030은 시계 및 주얼리 산업 전체의 기후, 자원, 포용 목표를 강조한 첫 번째 범산업 공동 프로젝트다. 업계의 윤리성과 지속 가능한 표준을 함께 끌어올리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티파니Tiffany & Co.는 2019년 다이아몬드 소싱의 원산지 공개를 시작했고, 이후 ‘풀 크래프트맨십 저니Full Craftmanship Journey’를 통해 가공 및 세팅 단계까지 투명하게 보여주며 소비자가 구매하는 제품에 대한 전 과정에서의 윤리성을 확인할 권리를 넓혔다.
럭셔리 산업은 단지 예쁜 것을 만드는 데서 올바른 방식으로 예쁜 것을 만드는 일로, 질문의 난도가 올라갔다. 시장을 이끄는 브랜드들은 이 질문에 재치 있게 답한다. 파네라이는 “우린 혼자 잘하고 싶지 않다”라며 지속 가능성을 높여줄 수 있는 공급업체를 공유했고, 프라다는 바다를 지키는 교육까지 브랜드의 세계관에 편입시켰다. 샤넬은 장인의 명맥과 기술과 가치가 끊기지 않도록 ‘집Le19M’부터 지었고, 티파니는 다이아몬드의 모든 여정을 고객에게 투명하게 공개했다. 이렇게 브랜드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가치’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완벽한 것은 없고 여전히 갈 길은 멀다. 그럴싸한 말로 ‘친환경’ 이미지를 활용만 하려는 브랜드들이 많다는 비판의 목소리 또한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럭셔리 산업이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고 실질적인 변화와 성과를 창출해야 한다는 과제는 이제 벗어날 수 없는 생존의 필수 요건이 되었다. 우리는 날카로운 시선과 관심으로 적어도 노력하는 브랜드들을 격려하고, 지속 가능성에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환경과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
유명훈 @sustainable.mark
국내 1호 지속가능경영 컨설턴트이자 ESG 전문가. ‘마크’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는 ‘koreaCSR’ 대표이자 ‘존경과 행복’ 출판사의 발행인이기도 하다.《밀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의 저자로 지난 20여 년간 100개 이상의 컨설팅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매년 100회 이상의 강연을 소화하고 있다. 강연할 때 입는 옷 하나도 지속 가능한 브랜드의 제품으로 착용할 정도로 세심히 신경 쓰는 그는, 현재 한서형 향기 작가와 함께 경기도 가평 ‘존경과 행복의 집’에서 거주하며 일과 삶 모두에서 지속 가능성을 실천하고 있다.
editor 송정은
words 유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