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e=김서균 한국팹리스산업협회 사무총장] 시스템반도체 육성에는 개발인력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벌써 몇 해 전부터 반도체 인력 부족의 심각성을 깨닫고 정부에선 이 분야 인력양성에 상당한 힘을 쏟고 있다. 그런데 방향이 그간의 우리나라 SW인력양성정책과 마찬가지로 숫자 채우는 성과에만 치우쳐 있다. 학부 인력양성, 기능인력 양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핵심은 고급 인재양성에 있다. 석박사 인력이 집중적으로 육성돼야 하며, 그들을 육성하기 위한 교수들을 제대로 지원해 줘야 하는데 중심 지원 방향이 기초인력 양성에만 집중돼 있다.
SW분야와 마찬가지로 이미 전기, 전자, 반도체 전공자들은 대학 등에서 많이 배출되고 있어서 신입 인력수급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기업들이 신규 채용된 직원을 제대로 된 업무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최소 2년 이상의 도제식 교육이 필요하다. 정부가 나서서 이 간격을 줄이기 위해 여러 기관과 대학을 통해 대학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6개월~1년 간의 반도체 관련 집중 특화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산업계로 배출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러한 반도체 관련 특화교육과정 중 대학기관으로서 KAIST가 운영하는 것이 최고일 수 있지만,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것으로 당연시 본다면 대한상공회의소의 특화된 인력양성 기능이 단연 국내 최고가 아닐까 싶다. 대한상공회의소 서울기술교육센터가 추진하는 취업 연계형 교육과정은 교육 기간도 길고, 실습이 병행되는 등 산업계의 요구를 반영한 맞춤형 교육으로 교육생이나 기업고객에게도 만족도가 매우 높은 국내 최고의 인력배출시스템이다. 신입 인력 배출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여기까지는 정부가 매우 잘하고 있다.
물론 대기업에서 대부분 인력을 싹쓸이해가니, 중소기업으로 취업하는 인력들이 상대적으로 적을수 밖에 없어 일부 인력 부족이 있을 수는 있다. 이건 조금 다른 문제라 이 정도에서 넘어가자.
문제는 고급인력들이다. 초급이 고급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업에서 최소한 10년 이상 일하든지, 아니면 유능한 교수의 지도 아래 혹독한 석사, 박사과정을 거쳐야 하는 등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는 대기업을 제외하곤, 반도체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기업의 체질이 매우 약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대학교의 고급인력양성시스템에 기댈 수밖에 없다.
고급인력양성을 위해선 고급인력인 유능한 교수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해줘야 한다. 교수의 연구환경을 보장해 주고, 열심히 연구하는 만큼 보상해 주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한 마디로 대학교수들을 최우선으로 우대해 줘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 무너져 있다. 우리나라는 반대로 가고 있다. 우수한 인재들이 너도나도 국내에서 교수를 하고 싶도록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연구한 기술을 활용해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충분히 열어줘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교수들은 우수한 학생들을 양성하는 연구실을 활성화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제자들과 창업하거나 우수한 제자들이 스스로 창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수가 잘나가야 연구실도 활성화되고, 이공계 기피 현상을 막으면서 우수한 석박사가 배출될 수 있는 시스템이 완성된다. 지금부터라도 정부는 대학교수들을 대우하고 우대해 줄 수 있는 파격적인 시스템을 마련했으면 한다. 미국처럼 말이다. 우수 인재들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와 교수가 기술로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면 된다. 물론 부작용 얘기를 하면 끝이 없다. 하지만 지금 겪는 부작용보다는 훨씬 나을 거다. 이렇게 하면 우수 인력이 해외로 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고, 영재고, 과학고의 뛰어난 학생들이 너도나도 의사가 되고자 하는 일은 없을 거다.
2000년대 초반 벤처붐에 힘입어 달랑 사업계획서 서너장에 막대한 투자금이 몰려들고, 이에 기술력 있는 대학교수들이 너도나도 교내창업과 사업체 겸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공계 교수들은 지금보다는 충분한 국가 R&D 지원을 바탕으로 석박사 과정 학생들을 육성할 수 있었고, 함께 고민하고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사업성공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게 됐다. 급기야는 창업교수들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대학이 산학협력단을 설치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고, 이에 모든 대학들이 산학협력단을 설치하고, 창업교수들에게 상당한 지분을 요구할 수 있게 됐으며, 교수의 R&D 수주에 대해서도 상당한 액수의 간접비를 징수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됐다.
이 시점에서 산학협력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산학협력단의 많은 순기능 중에 일부 아쉬운 부분만 언급한 것이므로 오해 없기를 바란다. 어쨌든 교내창업이 예전보다 매력적이지 못한 구조가 돼버렸다. 추가로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서 국가 R&D 지원금에서 교수의 인건비 책정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건 정말 최악이다. 한 마디로 연구실적이 우수하거나 기술 아이디어가 뛰어난 교수들은 굳이 R&D를 많이 수주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반도체 분야에선 2000년 중반부터 국가 R&D가 축소되면서 많은 교수들이 전공을 버리고 떠나게 되니, 반도체 고급인력 양성은 그때부터 쪼그라들기 시작한 것이다.
교수를 대우해 주고, 교수들의 자율연구를 보장하면 궁극적으로 대학이 더욱 살아날 것이고, 대학원이 활성화될 것이고, 석박사 고급인력은 자연스럽게 배출될 것이다. 지금도 교수라는 직업이 매우 자유롭고 좋은 직업이라는 것은 잘 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더 우대하고 많은 길을 열어줘야 한다. 스타교수가 많은 나라가 됐으면 한다. 이제는 대학 중심 인력양성을 넘어서 대학원 중심으로 넘어가야 할 때다.
한 발만 더 나아가서, 국내 국책연구소 고급 두뇌들의 근무환경과 대우를 파격적으로 해줘야 한다. 의사보다 더 나은 미래를 보여줄 수 있다면 많은 우수인재가 앞다퉈 과학자를 꿈꾸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금처럼 인재가 부족한 위기 상황에선 외국 반도체기업에 근무 중인 석학 또는 젊은 박사들을 불러들일 수 있는 획기적인 유인책을 마련해 그들을 모셔 오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런 인재들을 한국의 대학 또는 연구소로 유입할 수 있다면 스타교수 양성+고급인재 육성+실무형 인재 배출 세가지를 빠른 기간 안에 모두 챙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 기업은 특히 실무에 적합한 인재를 필요로 한다. 글로벌 기업 근무 경험이 있는 교수, 연구자들이 유입된다면 기업에 필요한 실무형 인재를 양성하기도 훨씬 빠르고 용이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엔비디아나 퀄컴 출신 석학들을 대학교수로 영입한다면, 대학원을 희망하는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되고, 고급인재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2년 전에 교육부 모처에서 대학 시스템의 성공모델로 해외대학 4개 정도 예시를 들고 와서 선진대학 육성을 위한 간담회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 어찌어찌 참석한 적이 있었다. 제시된 해외대학들의 성공의 본질은 모두 대학원을 중점적으로 육성했기 때문이라는 팩트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여느 다른 공공분야 회의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한 줄 기타의견 정도로나 묻혀버렸다. 다들 알고 있는 문제라고 가벼이 생각하고, 그냥 그분들이 생각하는 계획대로만 그럴듯한 개선방안을 마련해 봤자 그게 그것일 텐데 참 안타깝다.
지금껏 그분들이 주도해 온 인재육성정책을 어쩌면 송두리째 바꿔야 하는 상황이라 보수적일 수밖에는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고급인재양성은 대학원 중심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미 전 세계는 고급인재 전쟁 상황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젊은이들의 의대편중을 탓할 것도 아니고, 해외로의 인재 유출을 걱정만 하고 앉아만 있어서도 안 된다.
지금껏 잘해 왔지만, 앞으로는 개선이 아니라 새롭게 다 바꿔야 한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공무원 마인드’라는 말이 더 이상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인 표현이 되길 바란다. ‘완전히 바뀌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는 어느 누군가의 지적처럼 우리도 기존의 체계와 방식 안에서 혁신한다고 고민만 하지 말고 과감히 새로운 마인드를 가져보자.
김서균 한국팹리스산업협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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