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비엔날레에서의 짧은 인연은 베를린과 브뤼셀, 도쿄로 이어졌다. 앤갤러리는 직접 발로 뛰며 작가와 갤러리를 알리고, 세계로 향하고 있다.
분당에 자리한 앤갤러리는 2008년 개관 이후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다양한 페어와 전시에서 소개해 왔고 2019년부터 앤갤러리의 이사직을 맡고 있는 나는 김강용·서용선·전광영·홍정우·장 보고시안·바하티 시모엔스 등 여러 작가와 협업하며 작품이 관람객과 직접 만나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게 노력해 왔다. 앤갤러리에 처음 합류했던 2019년은 마침 미술시장이 호황기에 접어든 시기였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시장은 근 15년 만에 최대 부흥기를 맞이했다. 앤갤러리 또한 활발히 세일즈 활동을 펼치며 2021년부터는 국내외로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한지를 주요 매체로 사용하는 전광영 작가 등 명성 있는 아티스트와도 연결되었다. 그러나 2023년 상반기 팬데믹 특수가 끝나자 시장은 다시 원래의 속도로 돌아갔고 자연스레 판매량도 줄었다. 그 변화 속에서 나는 자연스레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품었고 고민 끝에 해외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직접 해외 페어 현장에서 발로 뛰며 갤러리와 작가를 소개하고 거대한 흐름에 따르기보다 작지만 진정성 있는 연결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 시작은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였다. 전광영 작가의 전시 오프닝 현장에서 유럽 전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화가 장 보고시안(Jean Boghossian)을 만났다. 그는 한때 보석 브랜드를 이끌다 화가로 전향해 불을 활용한 회화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보고시안 재단을 운영하며 비영리 활동을 전개하고 기관이나 브랜드와 협업해 세계 곳곳에서 전시를 이어왔다.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아르메니아 국가관 초대작가이기도 하다. 첫 만남은 그저 인사만 나눈 정도의 인연이었지만 이후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작업과 전시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무대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싶어 했고 앤갤러리는 작가와 비용적 부분을 협의하며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해 ‘마이애미 아트 바젤’에서 다시 만났을 때 보고시안은 “당신의 갤러리와 함께 전시를 해보고 싶다”라는 말을 건넸다. 우연한 만남이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2023년 앤갤러리는 ‘아트부산’ 그룹 부스에서 전광영, 김강용, 홍정우 등 앤갤러리 주요 작가의 작품과 함께 책을 불로 그을려 만든 보고시안의 작품 ‘볼케이노(Volcano)’를 비롯한 설치와 회화작품을 선보였다. 장 보고시안이라는 세계적인 작가를 국내에 소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앤갤러리는 작가를 알리기 위해 아트부산에서 전개하는 VIP 투어와 별개로 갤러리 VIP를 초청해 하루 두 차례 프라이빗 도슨트를 진행했다. 페어가 종료된 이후에도 줌 미팅을 통해 작가와 컬렉터가 만나는 Q&A 세션을 마련하고 보고시안의 작품 세계와 태도를 직접 소개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페어에서 선보인 작품 대다수가 판매되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고 이듬해에는 아트부산의 ‘커넥트(CONNECT)’ 스페셜 솔로 부스 초청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2024년 가을 앤갤러리에서 그의 첫 국내 갤러리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전시 작품은 국내외 컬렉터와 기관들이 적극적으로 구매하며 다시 한번 호평을 얻었다.
이 경험은 내가 갤러리 일을 하며 다시금 확인하게 된 하나의 원칙을 떠올리게 했다. 진심 어린 움직임은 언젠가 반드시 기회를 만든다는 것. 이후에도 앤갤러리는 외국 갤러리, 작가와 꾸준히 교류하며 해외로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컬러와 드로잉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어느 공간에도 조화롭게 스며들며 대중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며 구상적인 요소를 점차 더해온 그의 최근 작품에서는 성숙한 변화도 돋보인다. 이런 매력 덕분에 한국의 메가 컬렉터와 기업들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을 방문한 벨기에 브뤼셀의 리-보웬스 갤러리(Lee-Bauwens Gallery) 대표와 미팅을 가진 뒤 앤갤러리는 홍정우 작가의 개인전을 현지에서 선보일 기회를 얻었다. 추상회화 속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스토리와 그림의 선은 브뤼셀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고 주요 잡지에 소개되어 전시가 끝난 뒤에도 작품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컬렉터가 많았다. 이 인연은 다시 브뤼셀 남부에 위치한 보고시안 재단 운영 뮤지엄인 빌라 엠팡(Villa Empain)에서 열리는 ‘리미티드 에디션 아트 페어(Limited Edition Art Fair)’로 이어졌다. 전 세계 갤러리들이 한정판 작품을 선보이는 이 행사에서 앤갤러리는 홍정우 작가의 작품을 전시했고 현지 컬렉터에게 판매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24년 하반기 앤갤러리는 독일 베를린 아트위크의 유일한 페어인 ‘포지션스 아트 페어(Positions Art Fair)’의 초청을 받아 한국 대표 갤러리로 참가하게 되었다. 페어 측에서 우리의 작가 라인업에 관심을 가지고 먼저 제안을 준 것이다.
작은 갤러리에게 이런 연결과 확장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브랜딩이 강한 메이저 갤러리나 다국적 아트 플랫폼과 비교하면 우리는 더 많은 설명과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근처 아시아 국가의 페어에 꾸준히 방문하며 직접 갤러리들을 찾아가고 도록을 건네며 우리를 알리고 있다. ‘아트 센트럴 홍콩 페어’에는 홍정우 작가의 도록을 가져가 작품을 소개했다. 이때 도쿄에 새롭게 문을 연 고요 갤러리(Goyo Gallery)와 이어졌고 2025년 상반기에 이곳에서 홍정우 작가의 일본 개인전을 개최했다. VIP 오프닝부터 현지 컬렉터들의 구매가 이어지며 성공적인 결과를 거뒀다. 나는 믿는다. 예술적 완성도, 개념적 깊이, 작품의 독창성과 희소성, 그리고 작가의 꾸준한 열정이 뒷받침되는 작품이라면 결국 누군가의 취향이나 믿음에 닿게 되고 그 ‘누군가’는 세계 어디에서든 우리를 다시 부른다는 것을. 돌아보면 이 모든 연결의 출발점은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광영 오프닝 디너에서 장 보고시안을 만난 그 짧은 순간이었다. 이후 2023년 아트부산 그룹 부스, 2024년 보고시안의 개인전과 커넥트 페어 솔로 부스로까지 이어졌다. 또 이 과정에서 해외 갤러리들과의 연속적인 교류가 이어지며 베를린과 브뤼셀, 도쿄까지 닿을 수 있었다. 끊임없는 ‘작은 움직임’이 오늘의 앤갤러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서울’ 같은 대형 아트페어 시즌이 다가온다. 이 시기는 글로벌 갤러리와 유명 작가들이 서울에 모여 미술시장 전체의 열기를 단숨에 끌어올리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독립 갤러리에게는 중요한 시험대가 된다. 존재감을 확보하기 위해 독립 갤러리들이 선택하는 전략은 ‘규모의 경쟁’이 아니라 ‘정체성의 명확화’다. 부스를 어떤 컬러와 모양으로 꾸미고 조명을 어떻게 비추며 작품을 어떤 구도와 동선으로 배치할지, 짧고 굵게 작가를 소개하는 방법까지 세심하게 고민한다. 앤갤러리는 매년 아트페어를 단순한 판매의 장이 아니라 우리가 지향하는 예술적 태도와 작가의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무대로 삼는다. 관람객이 편안하게 작품을 즐기면서도 소장 욕구를 느끼게 하는 전시를 만들고 작품을 고르도록 유도하는 것이 목표다.
단순히 눈에 띄는 것을 넘어서 우리는 다음의 전략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가장 먼저 작가와의 깊이 있는 협업을 통해 ‘공동 기획자’로서 작품의 콘셉트, 소재, 형식, 설치 방식을 함께 결정한다. 둘째, 작품 선정에서부터 부스 디자인까지 연결되는 스토리텔링도 중시한다. 부스 전체를 하나의 전시 챕터처럼 구성해 동선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이 이어지도록 기획하여 다양한 작가가 참가하더라도 하나의 전시처럼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 셋째는 컬렉터와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페어에서의 대화를 기반으로 지속적인 교류를 진행하다가 개인전 및 그룹전에서 컬렉터 초청 프로그램을 별도 마련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전략을 관통하는 것은 갤러리의 태도다. 무엇을 보여줄지보다 왜 이 작품을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줘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중요하다. 같은 작가의 전시라도 다르게 보여줄 수 있는 감각과 자세, 그것이 앤갤러리의 힘이다. 메이저 페어의 조명 아래에서도 우리만의 색을 잃지 않기 위한 이와 같은 시도가 때로는 새로운 협업의 기회를 낳고 예기치 못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에게는 작아 보일 수 있는 갤러리의 존재감이 그렇게 점 하나처럼 찍히고 연결되며 시장의 흐름을 조금씩 바꾼다. 앤갤러리는 앞으로도 더 넓은 무대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나아갈 것이다.
미술계는 언제나 사이클이 있다. 상승과 하락, 주목과 침체는 반복된다. 하지만 그 속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갤러리가 있기에 한국 미술시장은 앞으로도 의미 있는 확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불황이라고 말하는 이 시기에도 진심을 다해 움직이면 상상했던 일들이 현실이 된다.
장준호 @ngallery_art
대학에서는 광고를 전공했고 졸업 후 글로벌 PR 및 패션 기업에서 마케터와 해외 영업직으로 6년간 일했으며 2019년부터는 앤갤러리의 이사로서 국내외 작가들과 꾸준히 협업 중이다. 좋은 작품을 발굴하고 깊이 있는 전시를 선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editor 신문경
words 장준호앤갤러리 이사
사진 제공 앤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