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만5000가구 공급 시행자로 나서···첫 대규모 직접시행
분양가 안정 기대되지만 부채 부담·품질 논란 여전
민간 참여 위축 우려도···“실행력이 성패 가를 전망”
[시사저널e=길해성 기자] 정부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접시행을 통한 공급 계획을 내놨지만 시장은 실행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직접시행은 민간에 택지를 매각하지 않고 LH가 스스로 사업을 맡아 주택을 짓는 구조다. 분양가 안정과 공급 속도는 장점이지만 LH의 부채와 역량 부담이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땅장사’ 비판 벗고···연간 7만5000가구 직접 공급
8일 업계에 따르면 이번 정책의 차별점은 공급 목표를 기존 ‘인허가’ 기준에서 ‘착공’ 기준으로 제시한 것이다. 정부는 전날 ‘주택공급 확대방안’을 발표하며 향후 5년간 수도권에서 135만가구를 착공하겠다고 밝혔다. 계획만 세워놓는 기존 방식과 달리 실제 공사에 들어가는 물량을 기준으로 삼아 공급 착시를 줄이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특히 수도권에 19만9000가구가 들어설 수 있는 공공택지 중 LH가 직접 시행을 통해 5년 동안 총 6만가구를 수도권에 공급할 계획이다. 여기에 LH 소유 비주택 용지의 용도와 기능을 정례적으로 심의·재조정해 1만5000가구를 추가해서 7만5000가구 이상을 공급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LH 역할은 택지를 조성해 민간 건설사에 분양하는 데 그쳤다. 이후 사업 주체는 민간으로 넘어가 분양 일정과 가격, 시공 품질 등을 민간이 전적으로 책임졌다. 공공은 토지를 공급하는 입장일 뿐 실제 주택 공급의 주도권은 민간이 쥐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공공기관이 땅장사를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번 대책은 이러한 구조를 뒤집는다. LH가 토지를 팔지 않고 직접 시행자로 나서 발주와 관리까지 전담한다. 공사 과정에서 생기는 의사결정권도 LH가 가진다. 민간 건설사는 도급업체로서 설계와 시공만 맡는 구조로 역할이 한정된다. 공급 주체가 민간에서 공공으로 이동하면서 분양가 책정과 공급 시기 같은 핵심 변수가 정부와 LH 통제 아래 들어오게 된 셈이다.
정부는 이를 통해 민간에 과도하게 흘러가던 개발이익을 줄이고 분양가를 안정화할 수 있다고 본다. 공공이 직접 발주하면 분양가상한제 적용이 더 수월하고, 고분양가 논란도 차단할 수 있다. 또 착공 시점을 정부가 조율할 수 있어 경기 대응용 공급 카드로도 활용 가능하다.
사실 LH가 전혀 직접시행을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과거 일부 소규모 사업에서 실험적으로 시행을 맡은 사례가 있었다. 공공분양 아파트 일부 단지나 임대주택 단지에서 LH가 발주·관리 역할을 수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물량은 제한적이었고 본격적인 대규모 사업은 아니었다. 시장에서는 이번 조치를 “공공이 직접 짓는 첫 대규모 실험”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 부채 160조···“재정구조 균형 무너질 수 있다”
문제는 LH가 직접 시행과 개발을 맡기엔 재정상태가 부실하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기준 LH의 총 부채는 160조1000억원으로 전년(152조9000억원)보다 4.7% 늘었다. ‘2025~2029년 중장기 재무관리계획’에 따르면 올해 말 170조원, 내년 말 192조원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부채비율은 이미 218%를 넘어섰고 향후 5년간 최대 14조원의 추가 적자까지 예상된다.
특히 LH의 재무구조는 사업 성격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공공임대주택 사업은 낮은 임대료 탓에 운영할수록 적자가 불어난다. 반대로 택지 조성과 토지 매각에서는 안정적인 수익이 발생한다. 지금까지 LH는 임대는 손해를 보고, 토지 매각으로 이익을 내서 메우는 구조로 버텨왔다. 공공임대라는 사회적 책무에서 생기는 적자를 택지 판매로 얻은 이익으로 보전해온 셈이다.
직접 시행하게 되면 이러한 균형이 깨진다. LH가 토지를 민간에 팔지 않고 직접 주택을 짓게 되면 매각 수익은 줄어드는 반면 공사비와 보상비 부담은 늘어난다. 결과적으로 적자 사업만 커지고 기존처럼 택지 수익으로 메우는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업계에선 “LH 재무구조가 취약해지고, 장기적으로는 재정 리스크가 누적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전문 인력 부족에 품질 우려까지···건설사 참여도 ‘미지수’
또 다른 문제는 LH의 역량이다. 지금까지 LH는 택지 개발과 임대 관리에는 익숙했지만 대규모 주택사업의 발주와 품질 관리 경험은 제한적이었다. 직접 시행이 확대되면 공정 관리와 안전 관리까지 전담해야 하는데 현재 인력과 조직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직접 시행은 단순히 공사를 발주하는 수준이 아니라, 설계·시공 전반을 관리하는 전문 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조직 확충이 없다면 속도전을 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품질 논란도 불가피하다. 실수요자 다수가 선호하는 건 역세권의 브랜드 대단지 아파트지만, 공공이 직접 짓는 아파트는 시설이나 마감에서 ‘공공주택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완공되는 아파트 품질은 고급 아파트가 아니라 공공주택 수준에 가까울 것”이라며 “싸고 좋은 집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지적했다.
민간 건설사의 참여 의지 역시 변수다. LH가 시행자가 되면 민간은 도급만 맡는데 공공 발주 단가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 수익성이 낮아진다. 최근 공공공사 유찰 사례처럼 민간이 참여를 꺼리면 품질 확보는 물론 공급 속도도 흔들릴 수 있다. 업계에선 “공사비 보장과 물가 연동 장치가 없다면 대형 건설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번 대책의 성패가 실행력에 달려 있다고 평가한다. 계획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대중 한성대 석좌교수는 “135만가구 공급은 종이에 적힌 목표일 뿐, 실제 착공과 준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며 “LH가 재정 부담을 줄이고 인력을 확충해 현장에서 공사를 제대로 진행해야 정책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