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e=김서균 한국팹리스산업협회 사무총장 ] ‘Go Global’은 이미 외쳤다. 하지만 순수한 우리 기술과 자본만으로는 AI 반도체 같은 시스템반도체의 개발과 상용화에 성공하기 어렵다. 시장 역시 국내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해야 우리 산업을 육성시킬 수 있을까?
그간 정부는 산업부 주도로 시스템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과기정통부도 원천기술 확보를 위해 꾸준히 지원을 계속해 왔다. 최근에도 정부는 여러 과제를 통해 적극적으로 시스템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산업이 제대로 육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건 왜일까? 그리고 왜 산업계는 여전히 정부 지원 정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대책을 요구하는가? 지난 20여년간의 노력을 돌아보며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시스템반도체산업만은 아니겠지만, 유독 이 산업에서만큼은 매년 요구와 대책이 번갈아 가며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럼에도 점점 쉽지 않은 상황으로 빠지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반도체 기술이 매우 빠르게 진화하면서 인력과 자금난이 발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지금껏 우리의 성장이 지체되고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큰 틀에서 개선점들을 나열하고 반영해봤자 근본적으로 정부 시스템을 바꾸기 쉽지 않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어서, 이것만은 꼭 바뀌기를 바라면서 몇 가지만 다루고자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부와 전담 기관들의 기획, 평가, 관리 등 전반의 문제점을 다 지적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한 기고 글을 십여 페이지 넘게 구구절절하게 써뒀다. 그런데 지난 8월 22일 대통령실에서 개최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원회의에서 ‘2026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 심의·의결하는 것을 시청한 후, 그동안 애써 작성했던 글들을 죄다 지워버렸다. 이번 정부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정부의 적극적인 추진 의지를 믿어 보자는 취지다. 기대된다. 그래서 이번엔 일부 부처와 R&D 전담 기관이 국가적 사명감을 가지고 행하는 것 중 심각한 것만 몇 개 짚어본다.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사소한 문제라 무시할 수도 있지만, 애써 세운 정책들이 잘 시행되지 못하는 이면에는 사소하다 싶은 이것들이 핵심적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많은 사람이 완곡하지만 끊임없이 개선 요구를 했음에도 여태 그대로인 걸 보면 그것이 잘못됐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게 맞다.
국가 R&D를 위한 제도혁신, 시스템혁신 등 방안 만들 때마다 공무원들은 매번 관리·감독 기능을 강화해 혁신이 제대로 시행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것이 문제다. 민간 자율로 맡길 수 있는 부분은 과감히 이양해 효율성을 극대화하여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에 효과적 대응이 가능할 텐데, 굳이 국가 R&D를 본인들만 책임질 수 있다는 망상과 함께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애국심은 또 무엇인가? 항상 그들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관리·감독 기능을 강화한 혁신안을 마련하고, 이것의 성공을 담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지금도 매일 서너건씩 정부 부처와 관리기관에선 이런 회의가 개최되고 있을 것이다.
민간 자율에 맡길 것은 제발 과감히 맡기고, 지켜보면 안 되나? 그렇게 수십 년간 관리·감독을 열심히 해서 잘 된 것이 얼마나 있는지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고생해서 만든 혁신적인 제도와 시스템이 매번 지나친 관리·감독 때문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투입된 자금만 낭비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R&D 연구비 사용도 네거티브(허용 중심) 규제로 바꿔야 한다는 말이 벌써 수십 년째인데 아직도 그대로다. 우리나라도 이미 시기적으로 포지티브(금지 중심) 규제에서 탈피해 네거티브 규제를 이미 시행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R&D 전담관리기관 인력도 부족해서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데, 이번 정부에서 그간의 관행 및 사고방식을 앞장서서 혁신하면 안 될까? 정부도 관리·감독 위치에서 탈피해 선진국답게 네거티브 규제로 각종 혁신에 신바람을 불어넣어 주었으면 한다.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하면서 감시만 하는 관리 감독 때문에, 연구자들은 돈 쓰고 행정 처리하는 데 시간 낭비하느라 정작 R&D는 흉내만 내는 식이다. 어차피 R&D 성공률은 거의 100%의 한국이니까. R&D성공률 100%도 벌써 10년 넘게 혁신책을 강구했는데 아직도 그렇다. 관리·감독 강화의 전형적인 네거티브 효과 아닌가? 바로 이것 때문에 국책연구기관들의 PBS(Project Based System) 부작용이 심각했던 것이다. 이번 정부에서 PBS 폐지를 결정한 것이 국가R&D의 미래를 위한 최고의 결정이 아닌가 싶다. 화이팅이다.
글로벌 협력을 강조했고, 글로벌통합센터의 필요성도 역설한 바 있다. 현재 정부에서도 비효율적인 해외센터들의 통합 운영을 고민하는 것으로 안다. 짜깁기식 혁신안과 통제 강화를 통한 보여주기식 통합개혁안은 더 이상 안된다. 따라서 해외센터 혁신안에서도 통제 강화, 관리·감독 강화 방안을 더 이상 고민해선 안 될 것이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지난 수십 년간 관리·감독과 전담 기관 관리자 파견으로도 성공하지 못했으면, 이제 통합센터 운영은 자율로 맡기고 그냥 지켜보면 어떨까 한다.
지금까지 정부의 시스템반도체 육성정책은 또 어땠을까? 크게 나무랄 데 없었고, 지금도 방향성에 무리가 없다. 정책 수립 과정은 무난하다. 전형적인 하향식(Top-down) 기획방식에 상향식(Bottom-up) 방식을 가미해 정부와 정책/기술 전문가들이 최소 몇 개월 이상 심혈을 기울여 수립한다. 이분들의 노고에 일단 경의를 표한다. 다만 문제는 그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 있다. 혁신이 필요한 부분이 바로 정책 실행 과정에서의 모순적 요소들이다.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있지만, 급한 대로 여기서도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혁신이 시급한 부분은 바로 과제기획이다. 각 부처 또는 전담 기관에선 정책수립 지원, 세부사업 기획 등을 위해 그 분야의 민간전문가를 채용해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PM(Program Manager). PD(Program Director)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서 그 분야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전문직으로 채용돼 정부를 대신해 세부사업 기획과 과제기획을 주도한다. 민간전문가를 활용하지 않는 분야는 전문위원회를 두어 전담기관에서 기획을 주도한다. 예전에는 하향식 기획이 한때 주도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요즘은 공정성 시비 때문에 대부분 상향식 기획에 일부 하향식을 접목해 기획한다. 전문성과 절차 면에서 문제는 전혀 없다. 기획과정에서 주도하는 전문가에 의해 기획 방향성이 약간 틀어질 수 있으나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전문가로 채용된 PM 또는 PD들 중에 전문성이 떨어져서 기획방향을 주도할 수 없거나, 공무원들의 꼭두각시로서 자신들의 전문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예스맨만 하는 경우다. 물론 전문성과 기획능력도 필요하지만,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 또한 중요하니 이런 분들이 선정될 수 있겠다. 하지만, 전문성과 기획력을 잘 갖춘 전문가를 채용하고, 이들이 전문성을 훌륭히 발휘할 수 있도록 권한과 자율성을 확실히 보장해 주어야 한다. 권한에 따른 책임 또한 무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획일적인 과제 기획시스템이 아니라, 분야, 대상 등에 따라 상향식 기획이 나은지 하향식 기획이 나은지를 먼저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과제기획 시부터 공정성을 확보하고, 모든 개발자에게 평등한 과제수행 기회를 주기 위한 취지는 좋으나, 이것들로 인해 국가 R&D 성과 창출에 걸림돌이 돼선 안 된다. 대부분의 기술 또는 산업에선 상향식과 하향식을 적절히 조화해 기획을 추진한다. 다만 시스템반도체 산업 분야만큼은 상향식 기획이 꼭 필요하다.
물론 대학과 연구기관을 위한 R&D기획은 다른 얘기다. 상향식 기획이 왜 필요한지 예를 들어 보자. 갑이라는 기업이 차량용 A반도체 기술 개발을 위해 a, b, c라는 기술이 필요해 정부에 수요를 제안했다. 을이라는 기업 또한 차량용 B반도체 개발을 위해 b, c, d라는 기술 수요를 제안했다. 둘 다 거의 비슷한 용도지만, 기업별 특성이 확실히 드러날 수 있거나 기술적 차별화가 드러나는 제품이라고 치자. 정부는 갑과 을로부터 받은 수요를 기반으로 최종적으로 a, b, c, d 기술이 접목된 C반도체 개발과제를 기획하고 공모했다. 갑과 을 그 누구도 100% 만족하지 못하지만, 어쩔 수 없이 또는 사업 제안에 참여해 누군가는 불필요한 기술까지 개발하게 된다. 물론 평가위원회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시제품까지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것이 FPGA로만 끝나면 다행인데, MPW까지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면 조금 심각하다. 시스템반도체는 대부분 고객의 요구에 맞추어 개발해야 하거나, 시장의 수요에 따라 개발이 필요한데, 개발비가 한정된 상황에서 대부분 고객의 요구와는 약간 다른 반도체를 개발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국가 R&D와 별도로 자신들만의 제품개발을 따로 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국가 R&D 수행이 제품개발에 상당히 도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발하고자 하는 제품과 국가 R&D가 상이함으로써 비효율적인 개발비 지출이 이뤄진다. 학연을 위한 과제나, IP 개발을 위한 과제가 아닌 경우엔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제안하고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이번에 산업부에서 주도하는 ‘K-온디바이스 AI 반도체 기술개발’사업이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받았다는 기쁜 소식 또한 들었다. 전형적인 상향식 기획에 의해 이루어진 기술 개발사업으로서 정말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만 몇가지 우려되는 것들이 있다. 항간에서는 이미 수행할 기관들이 정해져 있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렇다면 아무리 규모가 큰 사업이라도 굳이 선정평가를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기획 단계부터 수요자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사업이기 때문에 그냥 정책지정과제로 추진하면 어떨까 한다. 공정성 시비를 줄인다고 굳이 공고, 선정평가 등의 절차적 낭비를 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애써서 야심 차게 추진하는 사업이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이미 지난 정부에서 2023년 ‘글로벌 스타팹리스 육성사업’을 추진해 20개 기업을 선정하여 3년간 자율과제를 추진할 수 있는 정말 파격적인 사업을 전개한 바 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3년간 약속했던 개발자금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대폭 삭감해 버리는 상황이 연출됐다. 선정된 기업 입장에선 출범식까지 참여하며 기대했는데, ‘허탈하다’는 말밖에 안 나왔다. 올해 과제 종료이니, 어떻게 마무리하는지 지켜봐야겠지만, 전형적인 용두사미 사업이다.
‘K-온디바이스 AI 반도체 기술개발’ 사업은 이런 전철을 또 밟아서는 안 된다. 시작은 창대한데, 끝은 미약하게 아무도 끝은 책임 안 지는 사업이 안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또, 이 사업에 불필요한 절차나 관리·감독 강화 같은 장애물을 새로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기존의 보수적인(변화를 두려워하는) 전담 관리 조직보단, 범부처반도체사업단인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 같은 조직에 관리를 맡기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제발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평가제도, 평가시스템 그리고 정부과제 관리체계가 문제다. 과기정통부, 산업부, 중기부 등은 NRF. IITP, KEIT, KIAT, KIPA 등 전담 과제관리기관을 두고 평가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나름대로 공정성과 전문성을 표방하며 국가 R&D 과제를 평가한다. 특히 갖은 방안들을 동원하여 공정성을 최대화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어느 기관도 공정성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문성까지 훼손된 상황이다. 그저 감사에서 지적받지 않는 절차적 완벽성을 위해 수십 년간 뻔한 방안들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번갈아 가며 채택하면서 최선만 다하고 있을 뿐이다. 공정성과 전문성 두 가지를 다 잡기 위해서 전담 기관과 감사기관의 행정력 30%를 넘게 소비하고 있는 것이 전혀 효율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기획단계부터 기업을 선정하든지, 아니면 PM, PD에게 권한과 책임을 주든지 하면 어떨까?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텐데 말이다.
최소한 평가 당일 평가위원들이 평가 중에 누군가에게 전화 또는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실질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평가위원들이 사전에 서약서나 각서에 서명했으니 문제가 전혀 없다는 평가관리기관의 무책임, 무사안일, 행정편의적 요식행위로 절차적 정당성만 확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평가 간사들에게도 힘을 많이 실어줘서, 평가위원들이 편향적인 발언을 하거나 전문성 없는 발언을 할 경우 현장에서 조치할 수 있도록 해도 되겠다. 요즘 평가 간사들은 말 그대로 간사가 아니라, 그냥 운영지원만 한다. 평가해야 할 과제도 많고, 공정성 시비가 있을 수도 있어서 그렇겠지만 박사급 평가 간사들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평가 절차나 안내하고 평가장 관리나 하고 있으니 이게 뭔가 싶다. 그러니 평가장에서 편파적인 평가위원들이 판을 주도할 수 밖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평가시스템, 아무도 만족하지 않는 평가. R&D가 발전하려면 지금은 공정성보다 전문성이 우선이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전문적이지 않은, 게다가 편파적이고 공정하지 못한 평가위원들에 의해 무산되는 일은 제발 줄여야 하지 않을까? 평가장에서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내가 잘 아는데, 그 기술은 안 돼’라는 말을 하는 평가위원으로 인해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사장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R&D 과제를 평가받는 산·학·연의 수많은 주체들은 자신들의 제안이 탈락해도 좋으니, 제대로 된 전문가에 의해서 평가받았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한다. 오죽하면 그럴까? 할 말은 많지만 일단 이건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
기술 개발을 위한 정책은 정부가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 맞지만, 더 이상 정부가 직접 R&D에 섬세하게 관여하는 시대는 지났다. 가능한 민간에 많은 자율권을 부여하고 민간이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있도록 방향타 역할만 하면 된다. 여태 정부부처와 전담기관들은 그간 수립한 R&D 정책이나 사업이 시행과정에서 삐걱거리거나, 문제가 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항상 수립하고 더욱 혁신적이고 안정적인 대책을 마련한다. 대책의 핵심이 돼야 할 민간의 자율성 강화는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새로운 계획안에 대한 정부의 관리·감독 강화만 부각이 될 뿐이다. 혁신방안은 그렇다 치고, 관리강화를 왜 하는 걸까? 지난 수십 년간 관리와 감독의 주체로서 권한을 누려왔었는데, 자율로 맡겨두자니 도저히 잠이 안 오나 보다. 한마디로 헤게모니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게다. 나도 우리나라 시스템반도체 산업만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