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VEU 철회로 대중 반도체 압박 수위 높여
첨단은 동맹, 범용은 중국···산업 지형 이원화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미국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 대해 생산 증설과 공정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미국산 장비 반입을 사전 허가 없이는 할 수 없도록 제도화했다. 이로써 두 기업의 중국 공장은 기존 메모리 라인을 유지하는 역할에 머무는 반면 첨단 투자는 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상 유지·첨단 이탈’ 흐름이 한층 가속화될 전망이다.
1일 업계에 따르면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인텔의 중국 생산시설에 적용되던 VEU(검증된 최종 사용자·Validated End-User) 특례를 철회한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는 2일(현지시간) 연방관보에 게재될 예정이며, 120일 유예 기간을 거쳐 오는 12월31일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VEU 철회, 중국 내 한국 공장 ‘업그레이드 봉쇄’
VEU 제도는 2007년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도입됐다. 첨단 기술의 전략적 수출통제를 강화하면서도 동맹국이나 신뢰할 수 있는 기업에는 불필요한 행정 절차를 덜어주겠다는 취지였다. 지정된 기업이 ‘검증된 최종 사용자’로 등록되면 개별 허가 없이 미국산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안정적으로 들여올 수 있었다. 반도체처럼 기술 변화가 빠른 산업에서는 사실상 필수적인 제도였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중국 시안과 우시에 대규모 메모리 공장을 두고 있어 VEU 지정의 최대 수혜자였다. 장비 반입 과정에서 사전 허가를 면제받으면서 중국 내에서 안정적으로 공장을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VEU는 “중국 반도체 산업을 키워주는 뒷문(backdoor)”이라는 비판에 직면했고 결국 철회가 결정됐다.
반도체는 설계만으로는 생산이 불가능하다.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고 층을 쌓아올리는 노광기·증착기 같은 장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장비는 네덜란드 ASML, 일본 도쿄일렉트론,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램리서치·KLA 등 소수 기업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미국 기업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따라서 장비 반입이 막히면 공정 업그레이드 자체가 불가능하다. 기존 라인은 유지할 수 있지만 더 미세한 공정 전환이나 신규 증설은 사실상 차단된다. 삼성전자 시안, SK하이닉스 우시 공장이 이번 조치의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된 배경이다.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위원은 “메모리 산업은 순환적 업그레이드가 필수인데, 허가제 전환은 행정 비용과 시간 부담을 키우고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며 “삼성·SK는 중국 의존도가 큰 만큼 장기적 부담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첨단은 동맹·범용은 중국…공급망 이원화 본격화
업계에서는 단기적으로 BIS 개별 라이선스 신청 부담이 늘어나고, 장기적으로 중국 공장은 구형 메모리 생산 기지로 고착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에 따라 삼성·SK는 한국 평택·청주와 미국 텍사스 테일러, 인디애나 웨스트라피엣에 첨단 라인을 확대하며 투자 축을 옮기고 있다. 중국 공장은 현상 유지에 머무는 반면 첨단 투자는 한국과 미국으로 집중되는 구조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이원화’ 또는 ‘디커플링(decoupling)’이라고 부른다. 공급망을 둘로 갈라놓는 현상으로, 미국과 동맹국은 첨단 반도체, 중국은 범용 반도체를 맡는 구도가 점차 공고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정 연구위원은 “중국은 인도, 동남아, 러시아 등과 범용 칩 중심의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해가고 있고, 반면 미국·TSMC·한국 기업은 AI 시대 첨단 반도체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 기업과 정부의 대응 방식과 관련해서는 “삼성이 3·2나노로 내려갈수록 소부장 협력 없이는 경쟁이 불가능하다”며 “정부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같은 국내 인프라 조성을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단순 보조금보다 중소·중견 소부장 기업을 동반 성장시키는 구조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SK하이닉스는 “미국과 한국 정부와 긴밀히 소통하며 이번 조치가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중국 내 한국 반도체 공장의 안정적 운영이 글로벌 공급망 안정에 중요하다”며 “앞으로도 미국 측과 긴밀히 협의해 영향 최소화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